진정한 협객(俠客)이 되려면 협(俠), 의(義), 인(仁). 이 세 가지를 모두 갖추어야만 한다.
쉽게 말하자면 협이란 어렵고 약한 이를 수호하는 것을 협이라 칭하며, 의란 자신의 행동에 우러러 한점의 부끄럼 없는 것을 의라 부른다.
인(仁)을 논하자면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는 스스로의 수양심을 인이라 한다.
협, 의, 인은 정이라는 뿌리에서 파생된 가지와 같으니 셋 중 하나가 부족하다면 그것은 진정한 백도(白道)라고 할 수 없다.
협이 부족하면 방관만 하는 비겁자요, 의가 부족하면 말만 앞선 위선자일 뿐이며, 인이 부족하면 옹졸한 마음을 지닌 비굴한 자이기 때문이다.
“이 마을은 이제 틀렸나..?”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왜소한 체구의 노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탄식을 터뜨렸다.
이미 마을은 폐허가 된지 오래인 듯 불에 타 무너진 가옥들과 들짐승들에게 뜯기다 만 시신들만이 가득했다.
아직도 성이 차지 않는지 까마귀 떼들은 노인의 머리 위에서 가증스럽게 울어대고 있다. 볼품없는 체구의 노인은 그래도 미련이 남는지 한 번 더 폐허가 된 마을을 둘러본다.
이 노인의 겉모습은 별 볼일 없었지만 그 눈빛만큼은 젊은이들 못지않게 정기가 충만해 있었다. 마치 일대종사까지는 아니지만 나름대로의 무학의 경지를 이룬 절대고수와도 같은 느낌이랄까..누구라도 이 노인을 마주한다면 마음에서 우러나 절로 고개를 숙이리라.
‘역시... 그나저나 너무 참혹하군. 이것이 멸겁(滅劫)이란 것인가..?’
노인은 씁쓸한 표정으로 발길을 무겁게 돌렸다.
사실 이 노인은 이런 폐허가 된 마을들을 벌써 여럿 보아왔다. 그때마다 그는 혹시라도 살아남은 생존자가 없나 찾기를 거듭했지만 이제까지의 마을들이 그랬듯 이번 마을 역시 생존자는 발견되지 않았다.
‘천신밀교의 순례는 그 지나간 길에 귀신조차 머물지를 못한다더니.. 그 말이 정말이란 말인가?‘
사실 노인의 이런 행동은 정말 어리석은 행동일지도 몰랐다. 노인의 독백처럼 천신밀교가 지나간 자리에는 아직까지 살아남은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노인이 어떤 사람인지를 안다면 누구든 노인의 이런 행동이 당연하다고 여길 것이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음?!!”
그때 노인이 무언가를 발견한 듯 갑자기 어딘가를 향해 몸을 날렸다.
타앗!!
일단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자 여느 젊은 고수들보다 날렵했다. 그야말로 비호(飛虎)와도 같은 신법이었다.
그가 몸을 날린 곳은 마을 안쪽의 인가들이 응집해 있는 곳으로 이미 노인이 아까 전에 탐색을 마친 곳이기도 했다.
대체 그곳에서 무엇을 느꼈기에..?
“헉... 헉...”
여인의 상처는 생각 이상으로 심했다.
어떤 거대한 발톱이 할퀴고 지나간 듯 등에서 옆구리로 이어진 상처는 보기만 해도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로 참혹한 것이었다. 인간이 이 정도의 출혈을 하면서도 살아있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헉.. 헉..”
여인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필사적으로 걸음을 재촉하지만 그녀가 흘린 어마어마한 양의 피가 적들이 여유롭게 추적할 수 있는 흔적이 되리란 것을 미처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알면서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에 계속 걷는 것일 수도 있었고 그렇지 않다면 이제는 걸어야 한다는 집념하나만이 그녀를 무의식 중에 지배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여인이 이렇게 큰 상처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걸어야 했던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그녀를 추적하는 일단의 무리들 때문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녀가 사력을 다해 안고 있는 아이 때문이었다. 그녀의 적들은 그녀의 남편을 죽이고 이제 그녀와 하나밖에 없는 아이까지 죽이려하고 있다.
그래서 그녀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처절한,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도주를 계속 하는지도 모른다. 모정(母情)은 어리석으면서도 세상 그 어느 것 보다 강하다.
“독한 년이군. 누가 그놈의 계집이 아니랄까봐.. 흐흐흐.”
마치 상처 입은 토끼의 뒤를 여유롭게 쫓아가는 여우와도 같이 간사한 웃음소리가 굉장히 귀에 거슬린다.
강호의 것이 아닌 듯한 괴이한 복장을 입은 이 남자는 일단의 무리들을 이끌고 그녀가 남긴 혈흔을 쫓아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이정도의 피라면 저 독한 계집은 얼마 못가 제 풀에 지쳐 죽으리라. 그때가 되면 이 사냥감을 마음껏 유린해 줄 것이다!!
죽어가는 자가 흘리는 피와 저항하지 못하는 자를 상대로 얻는 정복감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것으로 이것을 생각하자 그는 벌써 입가에 침이 고이며 변태적인 성욕이 발동하고 있었다.
‘이제 이 골목을 들어서면... 흐흐흐.. 앙큼한 것 같으니라고!! 네 남편 놈이 지옥에서 그 꼴을 보고 통곡하도록 누구보다 처참하게 유린해주지.. 크흐흐흐’
그러나 그가 온갖 변태적인 상상을 하며 골목으로 들어서는 순간, 상황은 그가 원하는 것과는 정 반대의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건 또 뭐야?!!’
그의 눈에 보인 것은 막다른 골목에 쓰러져 죽어가는 여인을 살펴보고 있는 한명의 노인.
왜소한 체구에 별 볼일 없는 초라한 노인이었지만 순간 이 남자는 거대한 장벽 하나가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 것 처럼 느껴졌다.
“네 놈들이냐..? 사냥하듯 아녀자를 이 지경으로 만든 것들이..?”
잠시 여인의 안색을 살피던 노인이 분노한 눈빛으로 일행을 돌아보았다.
노인의 음성은 솟구쳐 오르는 분노로 인해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이 늙은이가 노망이 들었나보군. 천신밀교의 사자들을 보고도 감히..”
여인을 추적하던 괴이한 복장의 남자는 노인의 기세가 심상치 않음을 보고 잠시 움찔했으나 이내 조소를 머금으며 거만을 떨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강호에 그 악명이 쟁쟁한 천신밀교의 교도였으며, 그 쟁쟁한 천신밀교의 교도들이 지금 이렇게 무리지어 있었고, 또한 자신의 무공에도 상당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까지 생각하자 그는 이 노인이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겁낼 필요는 없다는 묘한 자신감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나머지 부하들도 그런 그의 생각에 공감하듯 무기를 꺼내들며 노인의 주변을 포위하듯 둘러쌌다.
약 칠 팔 명의 장정들이 주변을 둘러싸자 노인의 퇴로는 모두 차단되고 말았다. 이들의 행동으로 보아 합격술에 대한 상당한 훈련을 쌓은 무리들이 틀림없었다. 이 상태에서는 제 아무리 대단한 고수라 해도 쉽게 승리를 장담할 수 없으리라.
그러나 노인은 그런 포위망조차 가소롭다는 듯 조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한낱 하찮은 합격술 따위에 의존하다니.. 천신밀교도 시정잡배와 다를 바 없구나!!”
노인의 너무나도 엄청난 자신감에 괴이한 복장의 남자는 순간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쳐갔다. 무언가 기분 나쁜 불안감이 드는 것이 거슬렸으나 그것이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기에 그는 그 불길한 예감을 애써 부정하며 발악적으로 외쳤다.
“감히 신성한 본교에 대한 모독을...”
그러나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왜소한 노인의 두 손에서 폭발하듯 거대한 진기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자 순간 그의 뇌리에 한 사람의 악명(惡名)이 떠올랐다.
‘서..설마... 이 볼품없는 영감이..?!!’
후회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만약 이들이 이 노인의 정체를 알았다면 절대 이 노인과는 싸우려들지 않았을 것이다. 이 노인이야말로 정파를 대표하는 고수들 중 가장 많은 천신밀교도들을 죽게 한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노인의 이름은 이미 천신밀교에 있어서는 사신(死神) 그 자체였다.
그제야 그는 좀 전의 불길한 예감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지만 상황은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었으니..
노인의 분노에 찬 일갈이 그들이 세상에서 들을 수 있는 마지막 말이 되었다.
“노부가 죽인 천신밀교의 쓰레기들이 몇 되는 줄 아느냐?!! 니놈들을 빼더라도 천이 넘는다!!”
퍼어엉!!!
우뢰와 같은 폭음이 들리며 한줄기 광채가 주위를 휘감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괴이한 복장의 남자는 자신을 덮쳐오는 거대한 광채에 몸이 부서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절규하듯 외쳤다.
“배..백주선!! 당신이란 걸 진.. 진작에 알았더라면.. 크... 크아아아악!!”
술에 살고 술에 죽는 괴팍한 성격의 일대 종사.
기연을 얻어 ‘잊혀진 시대’의 유물로 보이는 실전된 무예를 익히고 있으며 그것은 도가의 무예로 추정된다.
서른하나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강호에 나선 이후로 혈무패왕(血茂覇王)에게 공식적인 패배를 인정하기까지 60여 년 동안 한번도 패한 적이 없는 무적의 고수로 철필서생(鐵筆書生) 매봉산(買鳳山)과 함께 정파 무림의 정신적인 양대지주로 추앙받고 있다.
후에 검황(劍皇)의 인품에 반해 그와 뜻을 같이해 천신밀교와의 전쟁에 참여해 수많은 천신밀교의 교도들을 물리치니 그 수가 족히 이천은 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공적을 인정받아 백도십삼천이 세워진 이후로 사대호법 중 가장 높은 서열인 도원호법(道元護法)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일전에 그를 꺾은 혈무패왕도 관상의 인물됨을 아까워하며 그가 자신과 뜻을 같이 할 수 없음을 안타까워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아이는 이미 울다 지쳐 그녀의 품에 잠들어 있었다. 세상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이 모습이 이제 그녀가 볼 수 있는 마지막 기억이 되리라..
그녀는 아이의 모습을 한참을 쳐다보았다.
눈앞이 점점 흐릿해 오는데도 그녀는 아이에게서 시선을 거두질 않았다. 노인이 그녀를 지켜보다가 안타까운 듯 한마디 건넸다.
“아이에 대한 걱정은 하지 말게. 노부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그제야 그녀는 아이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노인을 바라보았다. 호흡이 점점 가빠오는 듯 그녀는 노인을 바라보며 힘겹게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어르신의 성함은.. 어떻게 되십니까..? 비록.. 죽어가는 목숨이지만.. 은공의 함자를 알지 못한 채 어찌 편히 눈을 감을 수 있겠습니까..?”
노인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녀의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노부의 성은 관(關)가라네. 더 이상 말은 하지 말게나.”
“....감사합니다. 이 은혜.. 구천을 떠도는 넋이 될 지라도.. 잊지 않겠...”
깊은 숨을 몰아쉬며 그녀가 남긴 마지막 한마디였다.
관상(關祥)은 여인의 품에서 조용히 아이를 안아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시신이 들짐승들에게 유린당하지 않도록 가까운 야산에 작은 봉분(封墳)을 만들어 주었다.
그는 게을렀다.
그의 스승인 도원호법(度元護法) 관상(關祥)이 소문난 주선(酒仙)으로 게으르기가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였으니 그 제자인 천도협(天道俠)이 게으른 것은 당연한 이치일지도 몰랐다. 어떤 옹졸한 이들은 관상이 손수 지어준 천도협이란 이름이 그 사내에게 아깝다고 뒤에서 수군거리기도 했다.
그는 스승을 닮아 지나치게 낙천적이었으며 또한 술을 무척 좋아했다.
지금도 그는 나무그늘 아래 큰 대자로 드러누워 주도(酒道)의 이치를 연구하고 있었다.
사실 그는 무척이나 어두운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 십오 년 전 천신멸겁으로 인해 일가족이 모두 몰살된 기억..
그의 부모에 대한 기억은 잘 안 나지만 부친은 누구보다 용맹한 영웅이었으며, 모친은 누구보다 다정했던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 어쩌면 그가 지나치게 낙천적인 것도 이런 과거를 감추기 위한 하나의 처세였는지도 모른다. 그에게 하나의 소원이 있다면 그냥 남은 인생 별다른 무리 없이 편하게 살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어떻게 보면 무기력한 삶일 수도 있지만 그는 그런 것에 전혀 연연해하지 않았다. 복수도, 야망도 그에게는 그저 어리석은 자들의 집착으로만 보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 의로운 사람이기도 했다. 그리고 누구와도 스스럼없이 잘 지냈다. 때로는 길거리의 껄렁패들과 어울려 다니기도 했으며 어쩔 때는 남들이 모두 미친놈이라고 욕하는 사람과 밤새 이야기를 하곤 했다.
스스로의 의에 위배되는 행동이 아니라면 그는 모든 것에 대해 관대한 사고방식을 지닌 남자였다.
군웅성 안의 모든 사람들은 이 밝고 의로우며 사랑스러운 사내를 천도협객(天道俠客)이란 애칭으로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