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지럽게 교차되는 풍경.
어딘가 묘하게 낯이 익은 그 풍경들은 그야말로 지옥 그 자체였다. 차라리 죽여 달라는 귀를 찢는 절규와 폐허 속을 도망치는 다급한 발걸음.
들짐승의 무리 속에서 본 붉은 구름이 가득한 하늘. 그리고 어둠 속에 끌려가듯 사라진 잊을 수 없는 어머니의 얼굴..
버림받은 자가 갖고 있는 기억은 검붉은 안개 속을 헤매는 것과 같다. 찰나와 억겁이 공존하는 무의식의 방황 속에서 모든 것이 낯익고 또한 낯설다. 두렵고 외로우며 고통스럽지만 그것마저 즐기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을 의식은 방관하고 있다.
이것이 흔히들 말하는 악몽(堊夢)이란 것인가..?
풍운패자는 눈밭에 누워있었다. 아니 쓰러져있었다는 표현이 더 맞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직 북설산의 영향이 미치는 이 폐허촌락에 펼쳐진 하얀 눈밭은 그가 흘린 피로 인해 분홍빛으로 물든지 오래다.
“우윽...!!”
힘겹게 몸을 일으키자 배의 통증이 쑤셔온다. 어찌나 고통스러운지 그는 일어나기를 포기한 채 도로 누워버렸다. 그는 정신을 가다듬어보려 했으나 누군가가 기억을 토막 내서 가져간 듯 방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생사고락을 함께 해온 동료들은 없고 대신 본성의 일급 추적대원들이 무언가에 놀란 듯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자신은 그 한 가운데 쓰러져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나는... 분명..'
혼미해져가는 정신을 애써 가누며 사라진 기억의 파편을 더듬어본다. 그러나 그 파편이라 불릴만한 작은 기억조차 그에게는 없었다.
‘제길..'
풍운패자는 자신을 정면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를 보았다. 아무 감정도 없는 듯한 얼굴에서 풍겨나는 강인한 느낌은 그가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바로 저 남자가 풍운패자의 스승이자 아버지와도 같은 존재인 개세호법 상관엽이다. 그의 손에 들려있는 쌍극이 진기(眞氣)를 발하고 있는 것을 보자 그제야 잠시 망각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훗.. 그런거였나..?'
그는 툴툴거리며 모든 것을 포기한 채 눈을 감았다. 기억하기 싫은 조금 전의 일이 멀어지는 그의 의식 속에서 소용돌이처럼 맴돌고 있다. 이런 의식의 표류는 불확실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다가오는 법이다. 풍운패자는 그 표류 속에서 끊임없이 절망하고 있었다. 그는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이 순간이 삶의 끝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지독한 악몽은 끝났다. 다시 눈을 뜬다면 살아있다는 것이 어느 것보다 처절한 지옥이 되리라..놀란 추적대원들이 웅성대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의식이 멀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한참 후의 일이었다.
대체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이미 그는 자신의 방에 옮겨져 있었다. 방안엔 촛불이 켜져 있는 걸로 보아 야심한 시각인 듯 했다.
“망할 자식!! 오래도 자는군.”
곁에서 누군가의 투덜대는 소리가 들린다. 풍운패자는 몸을 일으켜 소리가 난 곳을 돌아보았다. 배의 통증은 이미 많이 가라앉은 후라 그가 몸을 일으키는데 별다른 지장은 없었다. 그러나 온 몸이 나른한 게 어딘가가 이상하단 느낌이 들었다.
‘설마...?'
풍운패자는 불길한 예감과 함께 조용히 운기를 시도해보았다. 결과는 그의 예상대로였다. 그의 몸은 일신의 내력이 모두 상실된 채 무공을 처음 배운 초보자와도 같이 되어버렸다. 주화입마로 무공이 폐(閉)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랄까..
‘훗...'
풍운패자는 자조적인 웃음을 툴툴 흘렸다.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게 뭐란 말인가..? 풍운패자는 아직 살아있는 자신에 대한 한없는 혐오감이 들었다. 풍운패자가 몸을 일으키자 투덜대던 남자는 말없이 찻잔을 내밀었다. 강인해 보이는 인상의 이 남자는 풍운패자의 친구인 번조(樊朝)였다.
“얼마나 지났지..?”
목을 축인 후 풍운패자가 입을 열었다. 배의 통증이 가라앉을 정도면 꽤나 많은 시간이 흘렀을 것임을 알기에 묻는 말이다. 대답은 그의 예상대로였다.
“닷새정도..”
풍운패자는 쓴웃음을 지었다.
닷새 전 천신밀교의 잔당들을 추적하던 와중에 적의 기이한 사술에 의해 실신해버린 이후로 그는 지독한 악몽을 경험했었다. 그 악몽이 그의 스승 상관엽의 손에 의해 멈춰졌을 때 그는 간절히 자신의 죽음을 소망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그의 바램일 뿐.. 삶은 가혹하게도 그에게 살아남으라고 강요했다.
“다른 동료들은 어떻게 됐나?”
물론 풍운패자는 그것이 물어볼 필요도 없는 질문이란 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악몽이 단지 악몽이었기를 바라는 어리석음으로 인해 이런 필요없는 질문을 하고 말았다. 역시나 풍운패자의 물음에 번조는 안타깝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의 대답은 풍운패자가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모두 죽었네. 자네는 운이 좋았어..”
풍운패자는 번조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저렇게 말하는 번조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어 그는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게 아니야. 번조... 그들은 모두....'
그랬다.
풍운패자가 꾼 악몽이란 바로 그가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동료들을 참살한 일이었다. 왜 그랬는지는 풍운패자 자신도 모른다. 그러나 기억에는 남아있다. 진정하라고 외치던 동료의 절규.. 그리고 멈춰지지 않는 이유 없는 분노. 그 순간순간이 잔인하게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어 풍운패자를 더욱 괴롭게 했다.
대체 왜 그랬을까?
혹시 적의 섭혼술(攝魂術)에라도 걸렸던 걸까? 그러나 섭혼술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의식이 또렷했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풍운패자 자신의 의지였다. 뭐랄까.. 마치 자신도 모르는 어떤 또 하나의 인격을 경험했다는 쪽에 가깝다고나 할까?
“괜찮은가?”
그의 표정이 이상함을 눈치 챈 번조가 조심스레 물어본다.풍운패자는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자리에 앉아 고민해봐야 어쩌겠는가? 우선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다듬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번 참상은 예고된 것일지도 몰랐다.
몇 달 전부터 그의 몸에 나타나기 시작한 이상증세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때는 단순히 자신의 수련방법이 어딘가 잘못되어 나타난 증상이 아닐까하고 무심코 넘겼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그것조차 괜히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래도 모든 게 석연치 않았다.
우연의 일치인지 운명이 안배해놓은 장난인지 천신밀교가 다시 나타나기 시작한 시점에서 나타난 몸의 이상증상. 그리고 천신밀교의 무리와 조우했을 때 겪었던 악몽. 무엇보다도 어린 시절부터 그를 줄곧 괴롭혀왔던 악몽 속의 작게 흩어진 영상들이 지금의 사건들. 이 모든 것이 일종의 연관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더 이상 자리에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무언가 조사를 할 필요가 있었다.
“최악의 상황이 된다면, 녀석의 목숨은 제 손으로 거두겠습니다.”
천외도원(天外桃園)을 빠져나오는 상관엽의 발걸음은 웬지 모르게 무거웠다. 자신의 제자와 관련된 ‘그 일'로 인해 그는 일곱 명의 원로들에게 많은 책망을 듣게 되었다. 이전까지 아무 문제없던 사파의 일류무사가 갑자기 광마(狂魔)와도 같은 행동을 하다니.. 그것도 사파 내에서 그 영향력이 큰 인물인 상관엽의 수제자가 그랬으니 칠기회(七旗會)가 이 기회를 그냥 넘어갈 리가 있겠는가?
다행이라면 어떻게든 풍운패자에 대한 징계는 그의 이름을 걸고 최소화시켰지만 그래도 이번 일은 꽤나 큰 파장을 부를 것이 분명했다. 상관엽이 걱정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파천삼장(破天三將)과 일곱 원로로 구성된 칠기회의 갈등!!
도제는 변함없이 그를 신임하고 나머지 파천삼장 역시 상관엽의 선택을 존중했으나 일곱 원로들로 구성된 칠기회의 영향력 또한 무시할 수 없었다. 아마도 그의 제자인 풍운패자는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혀 행동에 있어 많은 제약을 받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것은 상관엽에 대한 제재와도 같았다. 상관엽은 그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어느 세력이든 간에 그 규모가 커지면 내부적인 갈등은 피할 수 없는 문제였으며, 도제라는 영웅을 중심으로 뭉친 패왕파천련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칠기회와 파천삼장 간의 보이지 않는 신경전은 생각했던 이상으로 심각해지고 있었으며 이번 풍운패자 건으로 그 갈등은 점점 표면위로 떠오르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만약 도제라는 거대한 기둥이 무너진다면 패왕파천련은 어찌될 것인가? 생각만 해도 눈앞이 캄캄해져왔다. 상관엽은 달을 보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회색으로 얼어버린 듯한 달빛과 북설산에서만 들을 수 있는 특유의 바람소리가 답답한 가슴을 조금이나마 시원하게 했다. 문득 상관엽이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녀석에겐 가혹하군.. 운명이라는 거..”
상관엽은 풍운패자를 처음 만나던 때를 아직까지 기억한다. 폐허 속에서 발겨한 하나의 슬픈 빛..
어린 나이답지 않게 유난히도 고독해보였던 그 눈.. 그 눈빛에 이끌리듯 제자로 받아들여 녀석에게 지워진 가혹한 운명의 무게를 어떻게든 덜어주려 했지만 결국 그것은 상관엽의 의지대로 되지 않았다.
이제는 모든 것이 풍운패자 스스로가 해결해야 할 몫이 되어버렸다.
‘녀석의 몸에 남겨져 있는 저주의 흔적들.. 그것이 너를 변하게 할 때면..'
문득 상관엽의 두 주먹에 힘이 불끈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