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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무

혈무교

- 서장

-딱 한가지 맹세를 하마.
놈의 가증스러운 얼굴을 다시 보기 전까지 나는 절대로 죽지 않겠다. 그 하나뿐이다. 잘 들어둬라 하늘이여. 나는 천추의 한을 품고 그 무게만큼의 힘을 얻기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말았다. 오늘 이후로 내게 하늘은 없고 마도(魔道)만 있을 것이니 이것이 내가 하늘에게 퍼붓는 마지막 저주가 될 것이리라.
“여기 꼬마 하나가 쓰러져있습니다!!”
한명의 무사가 폐허를 수색하던 중 갑작스레 소리쳤다. 혈류천살(血溜天殺)은 성가시다는 듯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죽었다면 그대로 내버려두게. 어차피 들짐승들이 알아서 처리할 테니..”
그러나 그 무사는 조금 난감한 기색을 보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게 아니라.. 조금 이상한 꼬마입니다. 아직 살아있긴 한데..”
혈류천살은 한심하다는 듯 무사를 바라보더니 혀를 끌끌 차며 다가왔다.
“쯧쯧.. 천하를 호령한다는 혈무교(血茂敎)의 마인(魔人)이 기껏 꼬마하나 때문에 뭐가 그리..”
그러나 무사의 곁에 다가온 혈류천살은 말을 멈추고는 잠시 그 자리에 멍하니 서있었다. 그의 시선은 지금 바닥에 쓰러져 있는 한 명의 꼬마에게로 향해 있는데 그 눈빛이 마치 진귀한 보물을 발견한 마냥 흥미로운 빛이 역력했다.
“호오...”
역시나 혈류천살의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혈류천살은 자리에 앉아 꼬마의 얼굴을 더욱 자세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이거 재미있는 꼬마로군.. 흐흐흐..”
혈류천살은 꼬마의 이곳저곳을 훑어보았다. 꼬마는 이제 기껏해야 너댓 살 정도 되어 보였을까..? 피골이 상접한 채 바닥에 누워 겨우 숨만 헐떡이며 죽을 때를 기다리고 있지만 혈류천살이 보기에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무골(武骨)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혈류천살이 감탄한 것은 그 타고난 신체 조건만이 아니었다.
바로 눈빛!!
죽음에 임박해 오면서도 무엇 때문인지 눈빛만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듯 했다. 이것은 감당할 수 없는 원한과 증오, 분노를 담은 자의 눈빛이었으며 어떤 목적을 위해서라면 악마에게 혼이라도 바칠 수 있을 듯한 그런 눈빛이었다. 대체 이제 너댓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어찌 이런 눈빛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무엇이 이 아이에게 이런 눈빛을 가지도록 만들었을까.?
혈류천살은 문득 이 아이가 어떤 모습으로 자라는지 보고 싶어졌다. 그런 확신이 들자 그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꼬마에게 물었다.
“얘야.. 살고 싶으냐?”
꼬마는 이글거리는 눈을 혈류천살 쪽으로 돌렸다. 잠시 혈루천살과 꼬마의 눈빛이 허공에서 교차했다. 아무 말도 없이 침묵만이 한참 흘렀지만 그 속에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수많은 대화들이 오가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미 꼬마아이는 죽음의 직전에 도달해 무언가의 경지를 얻은 듯 했다. 이것은 선천적인 자질과 죽음 직전을 본 후천적인 경험으로 만들어진 멋진 작품이었다.
“살고 싶다면 니가 지금 바라는 것들이 그리 먼 일은 아닐테지..”
혈류천살이 악마와도 같은 미소를 지으며 꼬마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꼬마는 혈류천살을 한참 바라본 후 눈꺼풀을 한번 깜빡거렸다. 긍정의 의미였다.
“나를 따라오는 게 어쩌면 지금 죽는 것보다 더 힘든 길이 될 수도 있다. 그래도 살아볼 테냐?”
이번에도 꼬마는 한참 혈류천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눈을 깜빡였다. 혈류천살은 아이를 보며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품에서 하나의 단약을 꺼내 아이의 입에 물려주었다.
이것이 혈류천살과의 첫만남이었다.

그날 밤에 대한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붉게 타는 장원은 초열지옥(焦熱地獄)과도 같이 죽어가는 자들의 비명과 학살하는 자들의 괴성만이 가득했다. 그들이 한 일가를 몰살하는 데는 한시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만약 그날의 사건이 없었다면 그는 지금쯤 명망 높은 가문의 촉망받는 자제로 많은 무인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으리라. 타고난 무골과 집념, 그리고 무에 대한 천재적인 감각을 지닌 그가 스스로의 어두운 과거만 아니었더라면 강호에는 한 명의 악귀가 아닌 절세의 영웅이 탄생했을 수도 있었으리라..
여기 기구한 운명의 남자가 있다.
그의 가문은 선조의 명성으로 인해 가문 대대로 무림 내에서 깊은 존경을 받는 가문이었다. 그 옛날 지금의 강호를 세운 무신(武神)과 함께 무림을 구한 사대영웅으로 추앙받는 철왕(鐵王)의 후손인 그의 가문은 대대로 선조의 명성에 걸맞는 영웅들을 배출한 명문가문이기도 했다. 그의 조부와 부친 또한 강호에서 제법 명성을 날린 무인으로 그 역시 이런 가문의 전통을 이어받아 걸음마를 떼기 시작할 때부터 무공을 익히기 시작한 신동이었다.
그 서생차림의 중년인이 조부와 의형제만 맺지 않았더라도 그의 인생은 지금처럼 나락으로 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군자의 얼굴과 언행으로 강호에서도 명성이 높은 그 중년서생이 실은 인면수심의 파렴치한이었다는 사실을 조부가 미리 눈치 챘었더라면, 가문이 몰락할 일도 없었을 것이고 비전서(秘傳書)를 뺏길 일도 없었을 것이며, 그가 이렇게 천애고아가 되어 혈무교에서 복수를 꿈꾸는 악귀가 될 일도 없었을 것이다.
모든 것은 천신멸겁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 중년서생이 자신의 명성만을 믿고 항세신군(降世神君)에게 도전했다가 비굴한 모습으로 패해 도망쳤던 것이 모든 사건의 발단이었다.
그 중년서생이 조부를 찾아와 가문대대로 내려오는 비전서를 빌려줄 것을 요구했고 조부가 그의 요구를 거절한 것이 모든 사건의 계기가 되었다.
앙심을 품은 중년서생은 천신밀교에 가문대대로 내려오는 비전서의 정보를 흘렸고 때마침 천력인(天力印)의 행방을 수색하던 천신밀교에 의해 이 비전서가 천력인으로 오인 받는 일이 발생해 결국 그의 가문은 풍지박산이 나고 만 것이다.
조부가 목숨을 거는 저지 끝에 그와 그의 부친에게 비전서를 맡기고 피신시켰지만 악랄한 중년서생은 도움을 가장한 채 뒤에서 암습을 시도해 그의 부친을 살해하고 비전서를 탈취해갔다. 그가 그 참극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누구보다도 충성스러운 가노의 목숨 건 도주 덕분이었다.
그러나 모두의 희생으로 살아남았다고 하지만 이제 막 네 살 밖에 되지 않은 그가 무슨 방법으로 혼자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 그렇게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원한을 안고서 정처 없이 방황하던 그는 마침내 어느 폐허마을 안에서 굶주림에 지쳐 쓰러지고 말았다. 만약 그때 때마침 혈류천살이 그를 발견하지 않았다면 그는 그 자리에서 들짐승들의 먹이가 되고 말았을 것이리라.
그에게 있어 혈류천살은 새로운 인생을 준 아버지와도 같은 존재였다.
각마당(覺魔堂)의 생존훈련은 그 과정이나 모든 것이 극비사항으로 되어있다. 그 과정이 워낙에 처절하고 악랄했던지라 생존훈련에서 살아남은 야차들은 더 이상 인간의 마음이 남아있지 않는다.
이미 한번 멸문의 위기를 맞았던 혈무교가 이렇게 짧은 시간 내에 강호의 삼대세력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바로 이런 훈련과정을 통해 배출된 일당백의 야차들이 존재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것은 정.사 연합에 의해 배척당했던 그들의 역사가 지닌 수백 년의 한이 그만큼 깊음을 대변하기도 했다.
지금의 혈무교는 거대한 원귀들의 집합체라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이곳에 있는 자들 중에 한이 맺히지 않은 자가 과연 어디 있을까..?
“마지막 관문에서 과연 누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각마당의 당주(堂主)가 혈류천살에게 물어본다. 그들은 지금 각마당의 후문에 서있었다. 혈류천살은 각마당의 후문에 새겨진 악귀의 문양을 보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미 생존자는 처음부터 정해졌다네..”
각마당주는 혈류천살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그는 이내 그런 표정을 얼굴에서 지웠다. 혈류천살의 말이니 그것은 절대 틀릴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야말로 교주이신 혈무패왕과 가장 닮은 사람이기도 했다. 그 속을 알 수가 없으며 그 지략은 예측조차 불가능하다.
쿠르르릉...
마침내 각마당의 후문이 굉음을 내며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했다. 벌어진 문 틈 사이로 후끈한 열기와 함께 역한 피비린내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마인들에게는 가장 익숙한 냄새이기도 했다.
“역시...”
각마당의 후문이 열리고 그 속에서 한명의 인영이 드러났을 때 혈류천살은 만족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우람한 체구의 남자 한명이 문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인간의 감정이란 것을 모두 없애버린 악귀의 그것과도 같았다. 혈류천살은 그의 눈빛이 예전보다 더욱 무서워졌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그를 만족시키고 있었다.
“오오.. 상처하나 없이...!!”
각마당주의 감탄이 터져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각마당의 마지막 관문을 알고 있는 자라면 누구라도 지금의 이 당주와 같은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한명의 야차가 태어나기 위해서는 구십 구명의 목숨이 필요하다. 각마당의 마지막 관문은 바로 최후의 한 사람이 생존할 때까지 훈련생들끼리 서로 죽이는 것이었다. 이 과정이 워낙에 치열한지라 살아남은 자의 모습 역시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이 남자의 모습에서는 그런 흔적이 전혀 없었다. 이는 안쪽의 상황이 일방적인 학살이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지금 그 악마가 이곳을 향해 걸어오고 있다.
“새로 태어난 야차에게는 어떤 이름을...?”
각마당주의 물음에 혈류천살은 뒤돌아서며 짤막하게 말했다.
“흑살마인(黑殺魔人)!!”
이 한마디와 함께 혈류천살은 가벼운 걸음으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흑살...마인...”
그에게 딱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어쩌면 혈류천살은 처음부터 그의 이름을 정해놓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각마당주는 흑살마인의 모습을 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흑살마인이라.. 이것이 당신의 바램인가..?”
한참을 그 이름을 되뇌이던 그는 문득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혈류천살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며 조용히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것은 누구도 들을 수 없는 그 혼자만의 은밀한 독백이었다.
‘그러나 혈류천살은 틀렸다.. 그가 바라는 시대는 영원히 오지 않을 거야.. 흐흐흐‘
각마당주의 눈빛은 조금 전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