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야....??천신이란 자가 이렇게 볼품없는 늙은이였나...??”
오만하게 서있는 남자가 시선에 들어온다. 대충 삽십대 후반쯤 되었을까.
등에 매고 있는 한 자루 용형도(龍形刀)가 붉그스름한 광채를 빛내고 있는 걸로 보아
이자가 사파무림에서 명성을 떨친다는 도제가 분명했다.
“허나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는 알 수가 없는 법이지요. 저자의 수법은 괴이하고 악랄하니
조심하는게 좋을 것이외다.“
점잖게 들어오는 학자풍의 남자....역시 삼십대 중후반쯤 되어 보이는 용모에 온몸에 군자의
기운이 풍겨 나온다. 허나 그의 허리에 매여진 한 자루 푸르스름한 철검은 그가 보통신분이
아니란 것을 말해주는데....
이자가 바로 검황이리라!!
“크크큭....정파지존 검황과 사파지존 도제를 한자리에서 보게 되다니....이런 걸 두고 영광이라고 해야 하는건가.?“
검황과 도제...당대의 영웅 두 사람을 눈앞에 두고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는 흰 수염을 길게 기른 깡마른 체구의 노승이었다. 가삼을 걸치고 단정히 앉아있는 모습은 고행중인 석가모니처럼 거룩해 보이기도 했으나 조금이라도 그를 자세히 본다면 누구든 그 사악한 기운에 몸서리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정말 인간이 이리도 사악해 보일 수 있을까.?
이자가 바로 항세신군..또는 달광법왕(達侊法王)이라 불리우는 천신밀교의 교주로서 이
모든 무림의 비극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여기 오기까지 너무 많은 희생을 치렀다. 항세신군. 무림정의의 이름 하에 니 녀석을 처단해주마!!“
검황이 자신의 검을 들어올리며 비장한 어투로 말한다.
무림공적(武林公敵) 항세신군...!!
성지순례란 이름 하에 강호무림을 짓밟고 천신제라는 이름 하에 많은 무림인들이 산제물이
되었으며 삼도행신의 수행이란 이름 하에 수많은 여인들을 겁탈한 희대의 마두.
이 마두로 인해 무림은 얼마나 많은 것을 잃었던가!! 이제 그 모든 것을 끝내야할 순간이
온 것이다.
“큭큭큭... 크하하하하...”
갑자기 대소를 터뜨리는 항세신군. 그 웃음소리에 신전의 기둥이 흔들리며 천장에서
먼지가 떨어진다. 순간 도제의 얼굴에 긴장하는 표정이 스쳐지나간다.
‘이건....!!’
갑자기 항세신군의 웃음이 뚝 그치더니 그의 눈에서 안광이 폭사되기 시작한다.
쿠오오오...!!
좀 전까지만 해도 깡말랐던 항세신군의 몸이 믿기지 않게도 커다랗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는데....
우득..우드득...
몸이 부푸는 것만이 아니라 골격마저도 변하기시작하더니 이윽고 항세신군은 악귀(惡鬼)와도 같은 모습이 되었다.
악귀...그것은 정말 악귀였다. 지옥에서 갓 올라온 구척장신(九尺長身)의 거대한 악귀!!
그 거대한 악귀가 검황과 도제를 내려다보며 말한다.
"오너라....천신의 힘을 보여주겠다.!!"
"무신력 445년 2월. 검황과 도제, 전설의 오무자 중 정과 사를 대표하는 두 영웅이 연합하여 항세신군을 쓰러트리다.
그러나 항세신군의 시신은
어디론가 사라지다. 전쟁이 끝나고 주변의 참혹함에 많은 이들이 비통해하였다. 혈무패왕이 가장 먼저 자신의 영토로
돌아갔다."
-원소선생의 무림사기(武林史記) 연기(聯記) 천신멸겁 보충편 25장.
오랫동안 어둠 속에 있었더니 이런 약한 불빛에도 눈이 아프다. 노인은 한동안 감았던 눈의
통증이 사라지자 그제야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뜬다.
“아직도 불빛에 적응을 못하나보군.”
저음의 목소리....눈앞에 그 목소리의 주인공인 듯한 남자가 앉아있다.
숨 막힐 듯한 마기...노인도 한때 마공을 익혔지만 그가 익힌 마기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이곳은 혈무교의 지하감옥. 노인은 이곳에 감금된 후 십년 이상 되어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이미 전신의 경맥(經脈)이 끊어진 듯 움직이지도 못한 채 사슬에 거의 매달리다시피 묶여있는 노인의 모습은
사람이라기 보다는 푸줏간에 걸린 고깃덩어리에 가깝다고 볼 수 있었다.
“큭큭... 본좌는 네놈에게 할말이 없다!! 썩 꺼져라!!”
칼칼하게 쉬어버린 목소리가 노인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그렇다. 지금 노인의 눈앞에 있는 사내는 혈무교의 교주인
혈무패왕이었다. 혈무패왕이 아니고서야 이 세상의 누가 이렇듯 숨이 막힐듯한 마기를 뿜어낸단 말인가!!
“흐흐...십 오년동안 항상 같은 말만 하는군...생명의 은인에게 너무하는 것 아닌가.”
혈무패왕이 입가에 조롱하듯 비웃음을 띤 채 말했다. 그러자 노인의 헝클어진 백발속에서 한줄기 숨막히는 살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개자식!! 니 놈 때문에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져 앉지도 서지도 못하는 병신이 되버렸다!!
그러고도 생명의 은인이라고?? 본좌 지금도 매일같이 니놈을 갈아 마시는 꿈을 꾸고 있다는 걸 잊지 말라!!“
노인이 목에 핏대를 잔뜩 세우며 혈무패왕에게 저주를 퍼붓자 혈무패왕의 곁에 있던 거구의 사내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노인을 노려보지만 이내 제지하는 혈무패왕. 그의 단 한번의 손짓에 거구의 사내는 언제 살기를 품었냐는 듯 조용히
혈무패왕의 뒤로 물러났다.
“본좌.. 본좌라....? 큭큭.... 크하하하하...”
혈무패왕은 이글거리는 눈빛에 증오를 담은 노인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한참을 웃은 후 여전히 미소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노인에게 다가간다.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야지...그깟 십이천력인(十二天力印)이 목숨보다 중한가.....??”
“.......”
노인은 더 이상 대꾸도 하기 싫다는 듯 묵묵부답 혈무패왕을 죽일 듯이 노려보기만 할 뿐이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묘한 정적이 흐르고.. 대답해야 할 쪽도 들어야 할 쪽도 이 침묵 속에 몸을 맡긴 채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훗....역시.....”
먼저 체념하는 쪽은 역시 혈무패왕이었다. 할일이 많은 그가 이런 곳에서 시간낭비를 하고 있을 순 없는 일.
“좋아...오늘은 이만 돌아가도록 하지. 허나 이것만은 명심해라...앞으로 삼일이내에 십이천력인의 행방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본교주도 더 이상의 자비를 베풀 수없음을...“
“.....”
사실상의 사형선고를 마친 혈무패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철문을 닫고 나간다.
끼이익....쿵...
육중한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어두운 공간에 울려 퍼지며 묘한 정적을 만들어낸다.
다시 감옥 안은 어둠과 침묵과 노인만이 남게 되었다.
“....큭큭큭...”
혈무패왕의 기척이 완전 사라지는 것을 느낀 노인이 갑자기 웃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웃음소리는 점점 커지고...
“와하하하하!!”
한동안 미친 듯이 웃던 노인의 눈빛이 순간 번쩍이더니..
콰창!!
놀랍게도 그를 묶고 있던 쇠사슬이 순식간에 박살이 난다. 대체 다 죽어가던 노인의 어디에서 이런 힘이 솟아나왔단
말인가?!!
쩔그렁...
사슬 떨어지는 소리가 어둠 속에 울려 퍼지는 가운데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노인.
분명 경맥이 끊어진 폐인의 모습이었건만 지금 이 노인에게서는 좀 전의 그런 모습은 찾아
보기 힘들 정도로 위풍당당하다. 아니 위풍당당하다는 것은 좀 순화된 표현이며, 사실 그것은 거대한 악귀가 지옥에서 막 올라온 듯한 위압적인 공포감이라고 해야 옳을 수도 있다.
“삼일이라....건방지구나. 혈무!! 니 놈정도라면 이미 본좌의 공력이 회복되었다는 것도 눈치챘을 터....그럼에도 모른 척 한다는 건 본좌를 미끼로 쓰기 위함이렸다?“
슈우욱...
그의 몸에서 서서히 뿜어져 나오기 시작하는 사악한 기운. 그리고 어둠을 뚫고나오는 무시무시한 안광... 이 마왕(魔王)과도 같은 자를 누가 좀 전의 볼품없는 노인이라고 생각하겠는가?
“보나마나 십이천력인의 행방을 알기위한 수작일테지. 큭큭... 허나 이 항세신군을 너무 얕잡아봤구나 혈무. 본좌 네 놈 뜻대로 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크흐흐흐...하하하하하...!!”
어둠 가득 울려 퍼지는 이 웃음소리가 또 하나의 혈겁을 예고하는 소리가 될 줄은 그 누구라도 예상할 수 없으리라!! 그것은 한 사람의 교만과 탐욕에서 비롯된 실수가 낳은 최대의 비극이었다.
"무신력 460년 4월. 혈무패왕이 고의적으로 감금중이던 항세신군을 놓아주다. 혈무패왕이 즉시 사십여명의 야차로 구성된 추적대를 보내지만 일주일 후 모두 전멸당하고 만다."
-원소선생의 무림사기(武林史記) 연기(聯記) 삼왕강호전(三王江湖傳) 제 11편
강철과도 같은 팔..
촛점은 없이 살육(殺戮)에 대한 갈망만을 품은 붉은 눈..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와 살점이 묻어있는 거대한 칼..
십성공력이 실린 창끝도 허용하지 않는 불괴지신(不壞之身)의 육체.
이 괴물과도 같은 존재를 '그들'은 천신밀교 십대금강(十代金剛)의 하위금강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했다.
"헉..헉.. 대체 이런 괴물을 언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한명의 야차(夜叉)가 만신창이가 된 몸을 가까스로 일으키며 절규하듯 외쳤다.그의 주위에는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이 도륙나버린 시신들이 걸레짝처럼 여기저기 버려져있다시피 널려있었다.
혈무교가 자랑하는 사십여명의 정예대원들이 그만을 남기고 모두 몰살당한 것이다.
“예상외로군. 설마 본교의 금강이 쓰러질 줄이야..”
그들..
항세신군을 추적할 때 갑자기 나타난 일단의 무리들 중 한명이 놀랍다는 듯 중얼거렸다.
강호에서는 볼 수 없는 기괴한 복장을 하고 얼굴마저 이상한 문양의 금색 면포로 가리고 있어 자세히 확인할 순 없지만 굵직한 음성으로 보아 남자임에 분명했다.
“본교의 귀마술(鬼魔術)이 아직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는건가..?”
눈앞의 상대가 어떤 심정이든 상관없다는 듯 그는 무심하게 바닥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그들이 ‘금강’이라 부르는 것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괴물의 몸통만이 뻣뻣하게 누워있었다.
머리는 오간데 없고 그 자리에 무언가 터진 듯한 핏자국만이 가득한 걸로 보아 누군가가 강한 힘으로 머리를 터뜨렸음이 분명했다. 그것은 혈무교의 정예 대원 십여명이 동귀어진(同歸於盡)을 각오하고 공격한 결과이기도 했다.
그러나 심각한 듯 고뇌하는 면포괴인과는 달리 혈무교의 추적대 중 마지막 생존자인 남자의 안색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귀.. 귀마술?!! 설마 그게 정말로 존재했단 말인가?!! 그.. 그럼 네놈들은..?!!”
면포를 뒤집어 쓴 괴인은 그제야 한명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거만하게 말문을 열었다.
“이런.. 아직도 죽지 않았나..?”
무관심하기까지한 그 한마디에 이제껏 우두커니 서 있는 남은 금강들이 앞으로 뛰쳐나오기 시작했다.
“쳇!!”
파앗!!
살아남은 혈무교의 추적대원은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갑자기 빠른 속도로 반대 방향을 향해 몸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목숨을 건 도주였다.
‘여기서 죽을 순 없지!! 이 사실을 어떻게든 혈류천살님께...’
그의 머릿속은 은밀하고도 가장 신속한 도주로를 냉정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추적대원은 어떤 상황에서든 냉철한 판단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는 잊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상대는 그가 생각한 이상의 존재였다.
쉬익!!
한줄기 금빛이 그의 머리 위를 가로질러 눈앞을 가로막은 것은 순식간이었다.
“무..무슨..?!!”
단말마의 외침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그의 목은 한줄기 혈선을 그리며 자신의 몸에서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푸학!!
별다른 저항조차 못한 채 머리를 잃은 그의 몸은 바닥에 쓰러져 몇 차례 꿈틀거리더니 이내 뻣뻣해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면포괴인의 손에는 그의 목이 들려있었다. 대체 언제 어떻게 공격했으며 어떤 수법으로 머리통을 낚아챘는지
알 수 없었다.
“훗.. 아직은 때가 아니지.”
퍼엉!!
그의 손에 들린 수급은 순식간에 한줌 핏물로 변해 허공에 흩어지고.. 어느새 면포괴인의 신형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그가 남긴 독백만이 허공을 맴돌고 있었다.
“본교의 염원.. 천신의 재림이 이뤄지기까지 아직은 알려져선 안돼. 혈무패왕에게..그리고 검황과 도제 역시도..
“하하하..”
눈 앞에 앉아있는 중년남자의 상태는 생각했던 것 보다 심각한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조금도 어둡다거나 조급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뭐랄까.. 그에 대한 첫인상은 모든 것을 초월한 자가 가진 특유의 소박함이랄까.. 어쨌든 그가 지금 태연히 웃고 있는 건 확실했다. 누구보다 높은 기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결코 부담스럽지 않은, 같은 남자가 봐도 인간적인 매력이 느껴지는 그런 인상이라고 한다면 적당한 표현이 될 수 있을지..
어쨌든 능예가 본 이세진이란 남자의 첫 인상은 그런 것이었다.
그가 이세진을 처음 본 것은 막 강호에 처음 출도했던 청년 시절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둘 다 강호제일의 꿈을 안고
한 사람은 검을 잡고 또 다른 한 사람이 칼을 잡은 것은 어쩌면 어떤 운명과도 같은 것일지 모른다.
어쨌든 그 시절에 처음 만난 두 남자의 추억은 사소한 오해로 벌어진 싸움이었다. 그 운명과도 같은 첫 대결에서 이세진이란 남자도 그랬겠지만, 능예 역시 그때까지 가지고 있던 어떤 자부심같은게 모조리 산산조각 나버린 기억이 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그때의 기분은 신기하게도 유쾌한 것 같았다. 하루를 꼬박 싸우고도 결판을 내지 못했던 두 남자의 대결은 그때까지 그들이 갖고 있던 한계를 뛰어넘은 새로운 세계를 보여줬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그날의 유쾌했던 무승부 이후로 두 사람이 두번째로 만난 건 여러 해의 세월이 지난 후였다. 능예는 북쪽에서
'도제(刀帝)'라는 별호를 얻으며 무패신화의 명성을 쌓아갔고, 이세진이란 남자 역시 중부무림에서 '검황(劍皇)'이라는
별호와 함께 무패의 명성을 쌓았다. 두 사람 모두 이제는 뜨거운 피보다는 노련한 경험에 의존할만큼의 연륜과 그에
걸맞는 명성을 쌓고 있을 때 강호 전역을 공포로 몰아넣은 천신멸겁이 일어나 두 영웅의 재회는 뜻밖의 상황에서
이뤄진 것이다.
그 뜻밖의 상황이란 것은 이세진과 항세신군의 첫 대면에서 항세신군의 일장에 이세진이 처음 패배를 당하던 때를 말한다. 항세신군의 공력은 당시 북방을 호령하던 능예와 마존(魔尊)이라 불리며 새롭게 고수반열에 올라선 혈무패왕을 제외하곤 천하에 당할 자가 없다고 여겨진 검황 이세진마저 쓰러뜨릴만큼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지금 능예의 앞에 기혈이 역류하고 극독에 중독된 증상까지 보이며 생사의 기로를 방황하고 있는 저 이세진이 결코 능예보다 공력이 약한 남자가 아니었기에 도제 능예는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끼고 있었다. 대체 그들의 적은 어느 정도로 강한 것일까?
“오랜만이구려. 그런데 별로 좋은 모습은 보여드리지 못해 부끄럽게 되었소. 하하..”
이세진의 인사말이었다. 능예는 어이없다는 듯 바위에 등을 기댄 채 앉아있는 이세진의 앞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이 상황에서 웃음이라니?
“대체 어찌된게요?”
물론 능예가 상황을 모르고 묻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이세진의 반응이 그의 예상외인지라 그 자신도 모르게 이런
불필요한 질문을 하고 말았다.
“하하.. 뭐 보시다시피 그 달광법왕(항세신군의 별호)이라는 자에게 이런 꼴이 되고 말았소이다.”
눈앞의 이세진이란 남자는 털털하게, 마치 남의 일과도 같다는 듯이 말했다. 음성은 극히 기운이 없었으나 묘하게도 밝았다. 그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할 줄 아는 남자이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능예가 기억하고 있던 검황 이세진이라면 그 정도의 큰 그릇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의 이 고비만 넘긴다면 누구보다도 강해질 수 있는 그런 남자가 지금 눈앞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빌어먹을만큼 지독한 독공이구랴. 쳇...”
이세진의 상처를 살펴보던 능예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지며 상소리가 나왔다. 이세진은 대답할 여력도 없는지 그저 예의 그 미소로 툴툴거리며 웃고만 있었다. 문득 능예는 이 남자가 이대로 죽는 건 아깝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는 정파의 무리들은 모두 위선자라며 경멸해마지않았지만, 이 남자만큼은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아니 그가 이런 확신을
한다는 것이 좀 앞뒤가 안 맞는 말일수도 있지만 이상하게도 그는 그런 생각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
“.....!!”
순간 이세진의 몸이 움찔했다. 어느새 그의 몸에 전해지는 한 줄기 내력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뜻밖의 상황이었지만 이세진은 능예의 뜻을 알고는 그가 전하는 내력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허나 제 아무리
일대의 종사라지만 지금의 행동은 능예 자신에게도 위험한 것은 분명했다. 항세신군의 일장은 그만큼 지독한 것이었고
이세진의 치료에 몇 주야가 걸릴지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북방을 제패한 능예란 사내는
한번 생각을 굳힌다면 반드시 행동을 하는 부류의 인간이었기에 그는 지금의 행동을 함에 있어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에게 있어 말이란 것은 불필요하고 귀찮은 것이기도 했다. 능예 자신이 생각해도 그는 결코 정의로운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는 누구보다 사나이의 의리를 중시하고 있었다. 단 두 번의 만남이었지만 이세진은 그만큼 능예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준 사나이였다.
“쿨럭!!”
문득 이세진의 입에서 한줄기 검은 핏덩어리가 토해지기 시작했다. 내공을 통해 체내의 독을 몰아내는 작업을 시작한지 여덟 시간만의 일이었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순간은 지금부터였다.
능예는 천천히, 그러나 더욱 깊숙이 자신의 내력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도제 능예!!
이제는 패왕파천련의 련주로 ‘천외도선’이라는 칭호까지 얻은 한 세력의 총수이며, 수백만 사파인들의 정신적 지주가 된 이 남자는 문득 망치질을 하던 중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이미 십 오년도 전의 일이지만, 그때의 기억들은 도제의 일생에 있어 가장 강렬한 추억이기도 했다. 풍류와 승부와 낭만으로 천하를 주유하던 시절은 이제 다시는 돌아올 수 없으리라. 지금의 그는 희끗희끗한 백발이 보기 좋게 듬성듬성 자라나고 깊게 패인 얼굴의 주름들이 중후한 멋을 더해주는 노년의 일대종사(一代宗師)가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땅!! 땅!! 땅....!!
내력이 실린 망치는 경쾌한 소리를 내며 더욱 거세어진다.
근래 들어 능예는 철공들의 작업장에 찾아드는 일이 잦아졌다. 노년에 찾은 또 하나의 취미로 칼을 만드는 작업에 관심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치지지지직..!!
한참 망치질을 끝낸 쇳덩이를 물에 식혀보면 그 형체가 보다 확실히 드러난다.
물론 그가 쇠를 두드려 만든 칼은 시중에 널린 농기구보다 못한 형편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그가 만든 칼 같지도 않은 쇠붙이를 우습게 생각하는 이는 없었다. 그것은 그가 벼리질을 통해 점점 스스로를 하나의 거대한 칼로 다듬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전 백도십삼천의 사신으로 탁탑천왕(托塔天王) 탁응(卓鷹)이 오고난 후, 도제는 칼 만드는 일에 더욱 집중하기
시작했다. 어떤 날은 식음을 전폐한 채 몇날 며칠이고 망치질에 열중하던 때도 있었다.
그랬다. 도제 능예는 점점 재회의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자식들 간의 혼담과는 상관없이 언젠가는 이뤄져야할 검과 칼의 승부가 이제 이뤄지리라.
백도십삼천의 사신인 탁응이 보낸 예물 중 이세진이 그린 한 폭의 그림은 바로 그 도전장을 의미하고 있음을 능예는
느낄 수 있었다. 이세진이 즐겨 그린다던 평범한 난화(蘭畵)였지만 도제 능예는 그 한 폭의 그림에서 거대한 검을 보았다.
망치질을 하는 능예의 손이 어떤 장단을 타기 시작하고 그의 얼굴에는 실로 만족스러운 미소가 엿보이기 시작했다.
생각할수록 정말 유쾌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도제 능예의 마음에 담고 있는 칼은 더욱 빛이 나고 있었다. 칼의 재회를 위한 노래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무신력 459년 10월 말. 백도십삼천의 정원호법 탁탑천왕 탁응의 주도 하에 정.사 간의 혼담이 추진되다. 도제 능예는
기꺼이 자신의 외동딸인 능임과 검황의 아들인 이연웅의 혼인을 허락하였다."
-원소선생의 무림사기(武林史記) 연기(聯記) 삼왕강호전(三王江湖傳) 제 17편
걷잡을 수 없이 밀려드는 좌절감은 언제부터인가 자신도 모르게 증오로 변해가고 있었다.
내가 뛰어넘고자 했던 존재는 많은 이들에게 신(神)으로까지 추앙받는 무(武)의 정점에 선 자.
나를 분노하게 하는 것은 내가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산인 그가 나와 같은 피를 지니고 있음에 비롯되는 헤어날 수 없는 절망감이다. -
정파와 사파. 각 지주들간의 사돈결연(査頓結緣)이란 강호역사상 전에 없던 거사를 성사시킨 탁탑천왕 탁응이 군웅성에
돌아온 후, 많은 이들의 반응은 제각기 엇갈렸다. 보수적인 성향이 많은 것이 정파인들이라지만 천신멸겁이후 그들의
정서는 사파나 마교에 대한 거부감이 많이 완화된 것이 사실인지라 대다수의 정파인들은 이를 놀라워하면서도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일부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정통문파출신의 인물들은 이런 분위기를 납득하지 못하고 금분세수(金盆洗手)를 통한 은퇴선언을 하는 등 그 파장 또한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었다. 이런 파장은 천궁(天宮) 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진자성(陣字惺)의 행방은 아직도 못 찾았나?”
“네.”
검황의 물음에 충원호법(忠元護法) 용검천 (龍劍天)이 짧게 대답했다. 그는 본래 말수가 적은 사람으로 검황은 이미 거기에 익숙해진지 오래다.
“허허.. 이거야 원..”
검황으로선 전혀 의외의 상황에 답답할 뿐이었다. 물론 옆에 있던 용검천 역시 검황과 같은 심정이었다. 진자성이 누구인가? 검황의 친위대격인 금호군(金虎軍) 제일대장(第一隊長)이면서 홍와원 (紅靑院)출신의 젊은 고수 중 가장 장래가 촉망되는 인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 충성심으로 검황 뿐만 아니라 용검천을 비롯한 사대호법 모두에게 신망 받는 자가
아닌가? 그러나 이런 점을 떠나 무엇보다도 그의 이번 잠적이 검황이나 용검천에게 의외로 받아들여진 것은 진자성이라는 남자가 다름 아닌 사파 출신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정, 사 간의 혼담에 불만을 품고 잠적할 줄이야.. 평소
말이 없고 가끔씩 돌출행동을 보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가 이럴 줄은 누구도 예상 못했던 일이었다.
“혹시 웅(雄)이가 그의 행방을 모르던가?”
웅이란 검황의 외동아들인 이연웅(李延雄)을 말한다. 이연웅과 진자성은 동갑내기로 천궁 내에서도 그 친분이 유난히
두텁기로 소문나있다. 그래서인지 검황은 진자성 역시 자신의 아들과 마찬가지로 여겨오고 있었다.
“애석하게도 소천주 역시...”
역시나 짧은 대답과 함께 용검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검황은 탄식과 함께 연신 찻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의
음성에는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큰일이로군. 신부의 호위임무는 그가 적임자인데..”
“여기 있었나?”
진자성은 문득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백의를 깨끗하게 차려입은 준수한 미공자의 모습이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감탄할 수밖에 없는 영웅의 기백이 서려있는 그 준수한 미공자가 바로 검황의 아들이며, 이번에
도제의 사위가 되는 이연웅이었다.
“자네가 어떻게..?”
그러나 진자성은 이내 말을 멈추고 말았다. 절친한 벗에게 이런 말은 할 필요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내
멋쩍은 웃음을 머금고는 벗을 위해 자리를 한쪽 옆으로 비켜 앉았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천궁에서는 좀 멀리 떨어진 지역으로 하천에서 이어진 강줄기가 기암괴석과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는 곳이다. 이곳은 진자성이 간혹 타인과의 접촉을 피하고자할 때 찾아오는 곳으로 이연웅도 예전에 진자성을
따라 이곳에 온 적이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면 붉게 물든 석양이 강물에 부서지듯 반사되는 것과 고기잡이를
끝낸 늙은 어부가 느릿느릿 나룻배의 노를 저어 뭍으로 향하는 풍경은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한 폭의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연웅은 진자성의 옆에 털썩 주저앉아 조용히 눈을 감았다. 물씬 풍겨오는 강내음, 은은한 강바람소리와 멀리서 들려오는 노 젓는 소리가 복잡한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것 같았다. 이곳은 모든 것이 평화로웠고 모든 것이 시간에 구애받지 않은 고요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술이나 한잔 할까?”
이연웅의 말에 진자성이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연웅은 허리춤에서 술병 하나를 꺼내들었다. 그윽한
향기와 함께 꽤나 독한 술이었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게 한 모금을 마신 후 친구에게 술병을 건네주었다. 진자성 역시
단숨에 한 모금을 마셨다. 목을 타 넘어가는 느낌이 아주 좋았다. 두 친구가 아무 말 없이 주거니 받거니 하다보니
병에 든 술은 금방 바닥나고 말았다.
조금 더 가져올 걸 하는 아쉬움이 들었지만 어쩔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잠시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자성..”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이연웅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진자성은 고개를 돌려 이연웅을 바라보았다. 그의 절친한 벗은
강가를 응시하며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
“맹세하지. 자네의 마음을 아프게 하진 않을걸세.”
진자성은 그의 말에 씁쓸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연웅은 그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의 말 속에 담긴 깊고 진실 된 뜻을 진자성이 어찌 모르겠는가? 그런 그가 저 한마디를 하기까지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문득 진자성은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고 속 좁게만 느껴졌다. 그런 벗의 진심 앞에 자신은 한평생 정인(情人)을 가슴에 담아둔들
아무렇지 않아야만 하는데.. 남자답게 한잔 술에 호탕하게 웃어줘야 하는데.. 머리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이 쓰려옴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제는 벗의 아내가 될 그녀의 얼굴이 아직까지 뇌리에서 지워지지가 않는 것은 평생 안고가야 할 업(業)이 되어버린 것일까? 단지 남자이기에 내색하지 말아야할 많은 것들을 가슴에 품고 과연 오랜 시간동안
무너지지 않을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이 모든 상황은 진자성 스스로가 초래한 결과였다.
“미안하네. 이런 모습을 보여서..”
쓸쓸함이 가득 배어있는 진자성의 말에 이연웅은 말없이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어깨를 두 번 두드렸다. 그는 친구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진실된 한마디를 이미 전했고, 진자성이란 남자에게 더 이상의 말은 무의미했기에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인연이 묘하게 꼬였기에 이리 되었지만 어쩌면 지금 진자성의 자리에 있어야 했던 사람은 이연웅 자신이었을지도 몰랐을 일이었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연웅이었기에 그는 더 이상 친구를 방해하지 않으려 자리를 털고
몸을 일으켰다. 진자성은 그때까지도 복잡한 눈빛으로 강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해는 거의 모습을 감춰 주변이
제법 어둑어둑해졌고 늙은 어부가 몰던 나룻배는 시야에서 사라진지 오래였지만 그의 시선은 여전히 그곳을 향해 있었다. 이연웅은 그런 친구의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등을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때 진자성이 입을 열었다.
“길일은 정해졌나?”
이연웅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진자성은 여전히 강을 바라보며 앉아있었다. 아마도 스스로의 모습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리라.
“아.. 내년 3월에 마침 좋은 날이 있어서...”
“그래..”
진자성은 탄식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3월이면 신부에게 가장 어울리는 계절이다. 모든 것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잠시의 침묵 후 그는 입을 열었다.
“3월이라.. 기억하지.”
진자성의 말에 이연웅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두말없이 그곳을 떠났다. 그걸로 된거다. 진자성에게 지금
필요한건 시간이다. 3월이라면 현실을 인정하는데 충분한 시간이 되리라. 겨울이 지나기 전에 많은 것들을 눈 속에
묻어버리면 지금보다 조금은 나아지겠지.. 그때면 진자성은 진심으로 그들을 축복해줄 수 있을 것이다.
스릉...
이연웅이 시야에서 멀어지자 진자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칼을 뽑아들었다.
벽무도(霹武刀)라 이름 붙여진 그의 칼이 주인의 심정을 아는지 그 끝을 파르르 떨기 시작했다.
그는 조용히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칼과 노을이 부딪히면서 그곳엔 살갗을 에는 고독이 서리처럼 맺히기 시작한다.
“타앗!!”
사나이는 술로 갈증을 달래고 칼바람으로 눈물을 대신한다. 진자성의 도무(刀舞)는 그 밤의 달빛을 부수고 새벽의
여명을 가를 때까지 계속 되었다.
"양 세력간의 사돈결연에 상당수 무림인들이 반발하며 종적을 감추다. 검황이 진자성을 불러 신부의 가마를 호송하길
명했지만 진자성이 이를 거부하고 잠적해 서운해하였다. 항간에 따르면 도제의 외동딸인 능임(凌臨)이 본래 진자성의
정인(情人)이었던지라.. 이하 생략“
-원소선생의 무림사기(武林史記) 연기(聯記) 삼왕강호전(三王江湖傳) 제 19편
천하를 주유(周遊)해 사물의 모든 것에 정통하고 박식하며, 문장을 씀에 있어 누구도 당할 자가 없는 이가 있었으니
많은 이들이 그를 ‘문중선생(文中先生)이라 부르며 존경해마지않았다. 그 해박함으로 인해 정, 사, 마의 지존들이 온갖 예를 갖추어 그를 청하고자 했지만 그들 모두 차마 듣지 못할 욕설까지 들어가며 거절당했다는 것은 강호에서는 이미 유명한 일화다. 그는 무공의 무자도 모르는 일개 범인에 불과했지만 지금까지 수많은 무림인들이 그의 매서운 혓바닥에 의해
난자당했다. 그렇지만 누구 한사람 문중선생에게 보복이나 불만을 표한 이는 없었으니 그의 독설(毒說)은 누구나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묘한 힘이 있는데다 대다수의 강호인들이 그의 지식에 대해 진심으로 존경을 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금 무림에 있어 ‘무림사기(武林史記)’를 편찬한 이 위대한 문인(文人)에게 그 누가 악의를 품을 수 있겠는가? 그만큼 그는 현 무림에 있어 국보(國寶)이상의 존재였다.
그런 문중선생이 잠적했다!!
누구도 그가 어디로 갔는지, 왜 잠적을 했는지에 대해 알고 있는 이가 없었다. 다만 그의 시중을 들던 어린 시동의 말에 따르면, 몸의 굴곡이 드러나는 검은 옷을 입은 매우 아름다운 여인이 문중선생을 찾아온 이후로 그가 잠적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지인들이 추적에 능통하다는 고수들을 고용해 그의 행방을 조사해봤지만 모두 수포로 돌아갔었다.
대체 천하의 누구도 움직이게 할 수 없다는 문중선생을 잠적하게 한 여인은 누구일까?
인간이 위험을 감지하는 것은 경험에서 비롯된다. 특히 문중선생과도 같이 많은 것을 보아왔고 그만큼 해박한 자라면
그런 위험에 대한 예감은 일반인의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다고 볼 수 있다.
문중선생은 지금 눈앞의 저 여인에게서 그런 위험감을 느꼈다. 그녀는 한쪽 벽에 기대어 선 채 팔짱을 끼고 문중선생이 책자를 살피는 것을 감시하고 있었지만 정작 문중선생 자신은 펼쳐두었던 책자의 내용이 무엇인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마치 탕녀(宕女)의 요염함과 성녀(聖女)의 고결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듯한 이 여인에게서 문중선생이 느끼는
위기감은 항세신군이나 혈무패왕이 발하는 일방적인 공포와는 차원이 다른 그런 공포.. 그저 막연하게 이 여인과 함께
있으면 안 될 듯한 그런 기분이랄까... 그러나 그런 이성과는 다르게 모든 위험요소를 감수하면서까지 그녀와 함께 있고
싶다는 이율배반적인 욕망 또한 마음 깊숙한 곳에서 고개를 들고 있으니 이 여인의 무서움은 바로 그런 점이리라. 그만큼 눈앞의 여인은 매혹적이었고 혼을 바쳐서라도 곁에 두고 싶을 만큼 욕망을 자극하는 그 무언가가 있었다. 문중선생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치명적인 아름다움이란 것을 새삼 확인하고 있었다.
“아직 못 찾았나요?”
조용하던 밀실에 그녀의 나직한 음성이 잔잔하게 울려 퍼졌다. 문중선생이 고개를 돌려보니 그녀가 배시시 웃고 있었다. 순간 문중선생의 얼굴에 식은땀이 잔뜩 맺히기 시작했다. 그는 당황함을 감추려했지만 목소리는 이미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떨리고 있었다. 저 웃음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그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 조금만 더..더.. 기.. 기다려 보시오!!”
그녀는 문중선생의 말에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 정말 천진난만한 표정이었지만 왠지 모를 섬뜩함이 느껴지는 것은
어찌된 일일까? 문중선생은 다급히 자신의 앞에 쌓여있는 책들을 이리저리 뒤져가기 시작했다. 밀실 안은 몇 개의
횃불이 켜져 있어 비교적 환한 편이었다. 여기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저 많은 책들은 어디서 구해왔는지도 모른다.
알 필요도 없다. 다만 지금 문중선생이 할 일은 그저 저 책들 중에서 그녀가 원하는 것을 찾아내는 것뿐.
파락.. 파락..
문중선생이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이 모습이 정녕 천하의 어떤 것에도 꿈쩍하지 않던
문중선생이란 말인가? 대체 무엇이 그를 이렇게까지 만들고 있는걸까?
“?!!”
막 한권의 책을 펼치던 문중선생의 눈이 무언가를 발견한 듯 부릅떠진다.
얼마나 오래된 책인지 모서리 부분이 누렇게 삭아 보는 이의 인상이 절로 찌푸려질 정도의 낡은 책이었지만 문중선생은 마치 그곳에서 보물지도라도 본 마냥 얼굴을 더욱 가까이 댔다. 사실 워낙 책의 손상이 심해 가까이서 보지 않으면
알아보기 힘든 것 또한 사실이지만.. 문중선생은 알아보기 힘든 글씨들을 천천히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것은 ‘천력인’에 대한 이야기였다.
“천력인은 본교의 시작과 함께 성물로써 존재했었지만 그것의 기원은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볼 수 있다.
본교에 전해지는 교전에 따르자면 태초에 하늘과 땅이 갈라져 서로를 저주할 때에 세상은 아직 육도의 경계가 희미해
죽은 자와 산 자간의 질서가 흐트러진 아비규환이더라. 이에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던..”
문중선생이 읽고 있는 내용은 여느 이름모를 사이비 종파의 도인들에게나 전해질 법한 그런 이야기였다. 여인은 그런
내용에는 관심이 전혀 없는 듯 따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하지만 문중선생은 특유의 호기심과 집중력이 발동하여
책에 적힌 문장을 계속 읽어나갔다. 사물에 대한 집요한 관찰력과 호기심이 문중선생을 오늘날의 위치까지 있게 한
최대 장점이었다. 어쨌든 이 따분한 이야기는 대담하게도(?) 긴 시간 낭독을 요하는 장문이었다.
“...천신의 힘이 봉인되었다고 전해지는 천력인이 정확히 어떻게 생긴 것인지는 본교의 교주 외에는 누구도 알 수 없다.
그것은 특정방법 외에는 열 수도 깰 수도 없는 단단한 함에 봉인되어 있으며 열쇠의 행방을 알고 있는 십이성승과 교주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비록 일부지만 유일한 단서를 알고있던 나의 스승인 미록도 이곳에서 입적에 들기 전...”
여기까지 읽던 문중선생이 순간 눈살을 찌푸렸다. 다음 장에서 중요한 내용이 있을 법 했는데 애석하게도 그 부분의
훼손이 너무 심해 알아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체 무엇인지 알 수도 없는 얼룩들이 마치 피를 토한 자국처럼
덕지덕지 발라져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기분이 불쾌했다. 아니, 어찌된 영문인지는 제쳐두고라도 정말로
글쓴이가 피를 토한 자국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음....”
문중선생이 답답한 신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은 그가 무언가를 깊이 생각할 때의 버릇이기도 했다.
검은 옷의 여인은 그것을 아는지 벽에 기댄 채 아무 말 없이 문중선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밀실 안은 또다시
침묵으로 휩싸였다. 잠시 생각에 잠기던 문중선생이 조심스레 입을 연건 그로부터 반각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애석하게도 글로써 알 수 있는 건 이게 한계요. 다만..”
“다만..?”
문중선생이 뜸을 들이자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무언의 재촉을 가했다. 이런 작은 행동 하나까지도 사내의 묘한
욕망을 자극하는지라 문중선생은 그녀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이 책을 입수한 경로를 거슬러 가본다면 혹시라도..”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어느새 여인의 얼굴이 문중선생의 얼굴 바로 앞에 나타났다. 문중선생은 풍랑을 만나
휘몰아치듯 격동하는 감정과 그 아래로 잠겨드는 이성을 붙잡기 위해 그녀의 시선을 마주하지 않으려 했으나 마치
몸과 의지가 무언가에 홀려 마비가 된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그런 문중선생을 보며 재밌다는 듯 배시시 웃었다.
“가능하면 모든 정보망을 동원하죠. 하지만 착각하지마세요. 당신이 갚아야할 빚은 아직 끝난게 아니니까..”
“그..그런...!!”
그러나 그녀는 문중선생의 반박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밀실 한쪽 구석으로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문중선생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무언가 할말이 있는 듯한 모습이 역력했지만 결국 한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끼이이익... 덜컹!!
밀실의 기관이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그녀가 벽 뒤로 사라진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휴...”
검은 옷의 여인이 사라지자 문중선생은 탈진한 사람처럼 그대로 바닥에 퍼지듯 누워버렸다. 그의 온 몸은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었다. 이미 기력이 쇠하기 시작한 나이에 너무 많은 것들이 그를 힘들게 했기 때문이리라. 문득 한줄기
향기가 느껴졌다. 그녀가 남기고 간 정체모를 기묘한 향기였다. 익숙함 속의 낯선 향기.. 문중선생은 쓴 웃음을 지었다.
“많이 변했군... 그녀는..”
그랬다. 향기는 그대로였지만 사람은 많이 변했다.
문중선생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녀를 알고 있었다. 검은 옷의 여인이 말했듯 문중선생은 그녀에게 빚이 있었고 그 빚
이전부터 그녀와는 안면이 있던 사이였다. 그가 오래전에 알고 있던 그녀는 지금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세월이
지나면 기억은 좋은 부분만을 더욱 좋게 기억한다지만 그 모든 것을 부정하고서라도 그의 기억 속 그녀는 결코 지금의
저런 모습이 아니었다. 이미 사십여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무엇이 그녀를 그토록 변하게 했을까? 사람의 외모는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세월이 무색한 그녀의 모습을 처음 봤을 때 문중선생은 놀라기까지 했다.
다만 사람 그 자체가 달랐다. 달라도 너무 달라졌다.
“죽음 직전의 경험 때문인가..? 아니면 역시 그때의..!!”
문중선생은 자신의 기억을 곰곰이 되짚어보았다. 무림사기를 편찬할 정도로 강호의 일이라면 모르는 것이 없던 그의
기억 속에 그녀는 분명 존재했었다. 그의 짐작대로라면 아마도 그녀는 ‘그 사건’ 이후로 변했을 것이다. 그것은 모두
한 사람의 업보이기도 했다. 그 사람은 알고 있을까?
그때의 사소한 오해에서 비롯된 이 묵은 업보가 장차 강호에 미치게 될 파장을..
그것이 누구도 예상치 못한 처절한 비극이 되리란 것을..
"무신력 459년 11월. '무림사기' '귀마도감' 등을 편찬한 문중선생이 실종되다. 강호에 명성이 자자한 추적의 달인들이
모두 나섰지만 실패하다. 이 시기를 즈음하여 각지에 귀마의 활동과 그 발견사례가 자주 보고됨에 따라 각 세력의
영수들은 귀마의 존재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원소선생의 무림사기(武林史記) 연기(聯記) 삼왕강호전(三王江湖傳) 제 27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