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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

진자성전기

1. 멸천화극호패

북설산(北雪山) 내에는 금지된 성역(聖域)이 있다.
패왕파천련(覇王破天聯)이든 고대부족이든 북설산에 터를 두고 있는 자라면 어느 누구도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절대성역.
그곳은 고대로부터 북설산에 터를 두고 살아온 부족들에게 산의 왕이며 주인이라 불리는 천랑(天狼)이 산다는 낭운봉(狼暈峯)을 넘어서면 드러나는 깊은 골짜기로 백모곡(白母谷)이라 불리고 있다. 아직 골짜기에서 뼈를 에이는 한풍(寒風)이 불기 전, 그 안에는 희디 흰 백의를 입은 선자(仙子)가 살고 있어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과거야 어찌되었든 지금의 백모곡은 북설산에 휘몰아치는 한풍의 근원지답게 계곡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모든 것을 부셔버릴 정도로 지독한 한기를 자랑한다. 부족들의 전설에 따르면 골짜기 안에 살던 선자들의 분노로 인해 이런 매서운 한풍이 분다고 한다.
"제법 고약한 선자들인가 보군."
두꺼운 회색 모피를 입은 남자가 저 멀리 백모곡 부근에서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결코 작은 키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무릎 위까지 푹푹 빠지는 눈 속에서 얼굴을 제외한 온 몸을 모피로 두르다시피 한 그의 모습은 멀리서 보면 마치 한 마리 회색 곰이 눈밭위에 두발 딛고 서있는 것 같았다.
지금 그의 전방으로는 비슷한 복장을 한 몇 명의 사람들이 눈밭을 헤집고 다니고 있었다.
행색으로 보아 무기를 소지한 것이 무인들 같은데 보아하니 무언가를 열심히 수색하는 중인 것 같다.
그들은 눈보라로 인해 시야조차 제대로 확보하기 힘든 이곳에서 무엇을 찾고 있을까?
"이런 상태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수색을 하던 무인들 중 한명이 회색 모피의 거한에게 다가와 말했다.
상황을 보아 회색 모피를 입은 거한의 부하인 듯 보이는 이 남자는 이미 수염과 눈썹에는 하얗게 얼음이 맺혀있어 보기에 여간 낭패스러운 모습이 아니었다.
백모곡에서 불어오는 한풍은 몇 겹의 모피로는 감당할 수없을 정도였기 때문에 그의 이런 모습은 그리 이상한건 아니었지만..
회색 모피의 남자는 안 그래도 찡그린 인상을 더욱 찡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한심한 소리!! 열다섯 명의 인원이 그것 하나 제대로 못 찾다니!!"
"이 정도로 물러난다면 아버님께 내 체면이 뭐가 될..."

막 소리를 치던 모피 거한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무언가 놀라운 것을 본 듯 넋이 나갔다고 해야 할까?
또 한소릴 들을 각오를 하고 있던 부하는 거한의 표정이 이상해지자 반사적으로 그의 시선이 닿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털썩!!
무릎 위까지 쌓인 눈더미 위로 보기에도 무거운 칼이 떨어지는 소리다.
회색 모피의 거한과 마찬가지로 그의 부하역시 무언가에 놀란 듯 들고 있던 칼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수색에 집중하던 나머지 무사들도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모두 한곳으로 시선을 집중하고는 역시나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대체 그들이 본 게 무엇이기에...?

사락.. 사락..

쌓인 눈 위로 가벼운 옷자락이 끌리는 소리..
하얀 치맛자락이 눈 위에 끌리며 드러나는 작은 발.
그들의 시선이 닿는 저 곳에서 한 여인이 태연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이제 막 묘령을 넘겼을까..
옥을 깎은 듯하다든가 오뚝 솟은 콧날이라든가 여인의 아름다움을 칭송하기 위해 수많은 문인들이 마치 조각을 묘사하듯 만들어 놓은 표현들은 이 여인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다만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지만 차갑게 가라앉은 까만 눈동자가 유난히 사람을 깊게 빨아들이는 매력이 있다고나 할까..?
그 흔한 치장조차 하지 않은 채 자연적인 그대로의 모습..
마치 저 얼음계곡에서 걸어온 여신과도 같은 신비한 분위기를 발산하고 있는 이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있자면 누구나가 놀란 입을 다물 수 없으리라.
그러나 이 사내들이 놀란 것은 단순히 그녀의 미모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발을 디디고 서있는 곳.
건장한 사내들의 무릎 위까지 빠질 정도로 깊이 쌓인 저 눈 위에 아무렇지 않게 두 발을 딛고 사뿐사뿐 걸어오는 그 모습은 바로 전설로만 전해지던 답설무흔(踏雪無痕)의 경지 아닌가?
무신력(武神曆)이란 이름으로 현 무림의 역사가 시작되기 이전 '잊혀진 시대'에 이미 사라졌다는 그 신법을 다시 눈으로 보게 될 줄이야..
강호에 몸담은 자라면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전설의 오무자도 이정도의 신법을 구사했다는 말은 없었다.
하다못해 답설무흔이란 건 그저 옛 전설에나 등장하는 흔한 거짓말의 하나인 줄로만 알았다.
"누...누구냐?!!"
개중 한 녀석이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내뱉은 말이란 게 고작 '누구냐'였다.
이 한마디로 인해 지금 이들이 얼마나 극도로 긴장했는지 알 수 있으리라.
회색 모피를 두른 거한을 비롯해 그녀를 바라보던 모든 사내들의 몸이 극도의 긴장감으로 인해 본능적인 전투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이 한심해서였을까.. 문득 여인이 오 장 정도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씁쓸한 탄식을 내뱉으며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어리석구나.."
"뭐...뭣?!!"

차분하고 부드럽지만 어딘가 건조한 느낌이 드는 음성이다. 그리고 상당히 오만했다.
기껏해야 막 앳된 티를 벗은 계집애에 불과한 것이 제 애비뻘 혹은 삼촌뻘 되는 사람들에게 대뜸 하대를 해버리니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닌가!! 그러나 그녀의 신법으로 봐서는 쉽게 덤빌 수 있을만한 상대 또한 아니니 그녀를 바라보는 사내들의 심정은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이.. 이 건방진 년이...!!'

회색 모피의 거한은 이를 바득바득 갈며 그녀를 노려보았지만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눈 위에 발자국조차 남기지 않은 채 태연히 서 있는 저 신법도 신법이거니와 미칠 듯이 휘몰아치는 이 한풍 속에서 마치 춘풍(春風)을 맞이하는 나비와도 같이 나풀거리는 하얀 옷자락이 여간 눈에 거슬리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옷자락만이 아니라 칠흑같이 늘어뜨린 긴 머리카락 역시 가볍게 살랑이고 있었다. 대체 이 여인의 공력이 얼마나 깊기에 뼈 속까지 얼려버릴 듯한 이 추위와 강풍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일까..?

"너희는 정말 어리석다.. 충분히 도망칠 시간을 줬는데도 왜 그렇게 멍하니 서있지? 그렇게 죽고싶었던거야?"

그것은 분명 경고였다.
그녀의 말투로 보아 이 백모곡은 그녀의 영지였고 사내들은 그녀의 영지에 마음대로 발을 들여놓은 불청객임이 분명했다. 그럼 정말로 이 묘령의 여인이 백모곡에 산다는 전설 속의 선자란 말인가?
회색 모피의 남자는 처참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큭큭.. 설마 네년이 무슨 비설옥(秘雪屋)의 계승자라도..."

츄악!!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줄기 백광(白光)이 회색 모피의 장한에게 쏘아짐과 동시에 날카로운 파공음이 허공을 갈랐다. 그와 동시에 회색 모피의 장한이 한차례 몸을 떨더니 목에서 피를 뿜으며 썩은 나무토막처럼 눈 위에 쓰러졌다. 딱하게도 그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소.. 소성주(小城主)..!!"

회색 모피의 장한이 쓰러지자 그의 부하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이들의 행동으로 보아 어떤 세력에 속한 자들이었고 조금 전 비명횡사한 사내는 이들이 모시는 주인의 후계자쯤 되는 듯 했다.

"방자한 입을 놀린 댓가... 죽은 자의 전철은 밟지 않도록.."

어느새 쓰러진 시신을 앞에 두고 선 그녀가 놀란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좀 전의 하얀 빛줄기의 정체는 다름 아닌 그녀 자신이었다.
그 짧은 순간에 그녀는 오장 정도 떨어진 적에게 접근해 목을 베어버렸단 말인가?
그러나 여기 있는 사람 누구 하나 그녀가 어떤 수법으로 회색 모피의 장한을 해치웠는지 보질 못했다.
더군다나 그녀의 손은 지금 긴 소매 안에 가려져 있는 상태였기에 그녀가 검을 쓰는지 암기를 쓰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이.. 이년이 감히 소성주를!!"

갑자기 한 녀석이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그녀에게 몸을 날리기 시작했다.
두려움으로 인해 이성을 잃은 것이리라.
그러나 그 녀석 역시 먼저의 남자와 마찬가지로 목에서 피를 뿜으며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즉사하고 말았다.
남아있는 열세 명의 무인들은 그제야 그녀가 어떤 동작을 취하는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동작이란 게 특별한 것 없이 마치 춤을 추듯 한 쪽 팔을 들어올리며 호선(弧線)을 그린 것밖에 없었다. 긴 소맷자락이 호선을 그리는 그 자태가 워낙에 우아하고 아름다웠던지라 나머지 열세 명의 무인들은 잠시 자신들의 동료가 죽었다는 사실조차 망각하고 있었다.
백의를 입은 여인은 하얀 눈밭에 붉게 피를 흩뿌리며 쓰러진 시신들을 보고는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비록 그것이 자신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광경일지라도 그녀는 그런 사실 자체가 굉장히 불쾌해 보이는 듯 했다.

"어리석은.. 너희의 선택이 이렇다면 본 옥주(屋主)의 이름으로 너희 모두를 살려두지 않겠다!!"

그녀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전의 목소리가 부드럽지만 감정이 절제된 것이라면 지금의 목소리는 분명 노여움의 감정으로 인해 등골이 오싹할 정도의 싸늘함을 느끼게 했다.
이제 그들에게는 선택권이 없어졌다. 그들 중 한 녀석이 비장한 표정으로 이를 바드득 갈았다.

"소성주가 죽은 이상... 우리가 돌아갈 곳은 이미 없어진 것..!!"

말을 마침과 동시에 그가 몸을 날렸다.

파앗!! 파앗!!

한 녀석이 몸을 날리자 팽팽한 긴장감이 깨지면서 나머지 녀석들도 거의 동시에 몸을 날리기 시작했다.
방어를 일절 생각지 않고 몸을 날리는 동귀어진(同歸於盡)!!
오늘 상대를 잘못 만났을 뿐, 이들 각각의 무공이 결코 약한 것이 아닌지라 열세 명의 인원이 일시에 날리는 동귀어진은 그만큼 위력적이었다.
이들 모두가 죽더라도 그녀 또한 성치는 못하리라!!

"바보같이...!!"

그녀가 가볍게 인상을 찌푸리며 가볍게 왼손을 들어올렸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열세 명의 무인들은 그녀의 긴 소매에 감춰져있던 하얀 손과 소매 안에서 발산되는 싸늘한 빛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빛은 그들이 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마지막 빛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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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설산의 설원에는 호랑이가 없다. 아니 예전엔 있었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없다.
그 이유는 낭운봉의 늑대무리 때문이다. 이들 늑대들은 유난히 흉폭하기로 악명이 높은데 호랑이들조차 건드리지 못할 정도라고 한다.
때문에 북설산의 고대부족들은 늑대를 숭배하며 천랑(天狼)이라 불리는 늑대의 신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이들 늑대 무리는 북설산에서만 볼 수 있는 하나의 명물이기도 했다.

콰직!!

"깨갱!! 깽!!"

막 한 구의 시신을 끌고 가던 늑대 한 마리가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에 의해
처참하게 밟혀 죽었다. 하얀 눈 위로 피와 살점과 내장이 터져있는 모습은 너무나도 선명해 구역질이 나게 했다.
그러나 검붉은 갑주를 걸친 남자는 불쾌해 보이는 표정은커녕 아무렇지 않은 듯 보였다.
일반 장정들보다 조금 더 커 보이는 키에 약간은 날렵해 보이는 몸매를 소유한 이 남자는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자신의 갑주처럼 검붉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서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은 공교롭게도 피에 굶주린 붉은 늑대와도 같았다.
이제 막 중년에 들어선 듯한 남자는 비교적 쾌남형의 얼굴이었지만 꽉 다문 붉은 입술 끝이 살짝 올라가있어 어딘가 비열하고 악랄해 보이는 인상을 심어주고 있었다. 깊게 패인 그의 눈빛은 묘하게도 즐거운 빛을 띠고 있는 듯 보였는데 그것은 어떻게 보면 걷잡을 수 없는 광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것은 이 남자가 누구보다 더 위험한 사람이란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게 했다.

멸천화극(滅天火戟) 호패(豪狽)!!

붉은 갑주를 걸친 남자는 그렇게 불렸다.
만약 무림의 인물에 정통한 어떤 사람이 이 남자를 보았다면 그는 그 자리에서 거품을 물고 쓰러졌을 것이다.
그만큼 그 남자의 이름은 무림에 있어 악명이 자자했기 때문이다.
멸천화극 호패가 누구인가?!!
바로 현 무림에 있어 '전설의 오무자(五武子)'와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다고 여겨지는 한 사람으로, 그 천성적인 잔악함과 난폭함을 바탕으로 북설산 너머의 신비대륙 내에 거대한 세력을 이룬 북방의 폭군이라고도 불리우는 인물이 아닌가!!
그런 거물을 눈앞에 두고 어느 누가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단 말인가!!

"소성주의 시신이 분명합니다. 저 회색모피는 그분이 늘 즐겨 입던 것입니다."

어느새 호패의 뒤로 한 사내가 부복한 채 침통한 어조로 보고를 했다.
호패와 마찬가지로 전신을 휘감은 검붉은 복장을 한 사내의 얼굴은 인피면구(人皮面具)를 쓰고 있어 어딘지 모르게 소름끼치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멍청한 놈같으니..!! 이렇게 약해빠진 녀석은 이 호패의 자식이 아니다!!"

호패는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은 채 조금 전 늑대가 끌고 온 시신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미 몇 마리의 늑대무리가 뜯어먹은 듯 많이 훼손된 상태였지만 인피면구를 쓴 남자의 말대로라면 생전에 소성주라 불리던 시신은 호패의 자식임이 분명했다.
금수도 제 새끼는 끔찍이 여긴다던데 하물며 인간은 오죽하겠는가..?
그러나 이 북방의 폭군에게 있어 그런 상식은 전혀 통하지 않는 듯 했다.
그저 비웃음과 경멸의 빛을 가득 담은 시선으로 자식의 시신을 내려다 볼 뿐...
그에게 있어 인간은 강자와 약자로 분류할 수 있는 존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것은 설령 그의 피를 이어받은 자식이라 할지라도 예외는 없었다.

"어떤 놈인지는 알아냈나?"
"그게... 어찌 된 일인지 행적을 잡기가.."

호패의 물음에 인피면구의 사내는 더듬더듬 대답했다. 무언가 일이 잘 풀리지 않는 듯 보였다.

"행적을 잡기가 힘들다니..? 설마 본성의 무사들을 전멸시킨 녀석이 무슨 귀신이라도 된단 말이냐?!!"

인피면구의 사내는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호패의 성격으로 보아 대답여하에 따라 순식간에 개죽음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여러 해를 주인으로 섬겨왔던 호패는 그러고도 충분히 남을 인간이었다. 북방의 폭군이란 별호가 괜히 붙었겠는가?

"이런 말씀드리기 송구스럽지만.. 아마도 '비설옥(秘雪屋)'이 다시 강호에 나타난 게 아닐까하고..."

순간 호패의 두 눈이 크게 부릅떠졌다.

"방금 비설옥이라 했느냐..?"

그렇잖아도 호패의 눈은 깊게 패여져 있어 어딘가 무서워 보이는 인상인데 이렇게 크게 부릅뜨니 보는 이의 숨이 멎을 정도였다. 인피면구의 남자는 감히 그 눈빛을 마주하지 못하고 무릎 위까지 쌓인 눈 속에 얼굴을 파묻은 채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호패는 그런 그의 머리통을 잡고서 한손으로 번쩍 들어올렸다.
인피면구를 쓴 남자의 덩치가 꽤나 건장한 편이었기에 호패의 이런 악력은 정말 가공할만한 것이었다.

"비설옥이 십 오년 전에 멸문 당했다는 것은 누구나가 아는 사실인데.."
"니놈이 설마 목숨을 부지하려 거짓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

남자는 비록 인피면구를 쓰고 있어 어떤 표정인지 볼 수 없으나 호패의 손에 붙들린 채 학질 걸린 사람처럼 경련을 일으키는 걸로 보아 매우 고통스러운 듯 보였다.

"큭... 크으윽... 소..소인이 어찌..감히..!!"

호패는 잠시 인피면구의 사내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그를 눈밭위에 내동댕이치듯 놓아버렸다.

"커억... 컥.."

인피면구의 사내는 차가운 눈밭위에 쓰러져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워낙 감정이 격했던지라 호패 자신도 모르게 주입된 내력이 사내의 진기를 크게 흩트려놓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호패는 그런 사내에게 조금의 미안한 표정도 없이 말했다.
"사흘의 시간을 주마. 어떤 수단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꼭 찾아내야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것이다!!"
"알았냐?!!"

호패는 일대종사라 불려도 될 정도로 무학의 경지를 터득했지만 그의 행동이나 말투는 시정잡배들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는 세상 모든 이치가 자신의 기분에 달려있는 그런 남자였다.
인피면구의 남자는 호패를 오랫동안 모셔왔기에 누구보다도 그를 잘 알고 있었다.
멸천화극 호패가 사흘 안에 찾으라고 명한다면 이유 불문하고 무조건 찾아야만 한다. 그것만이 살 길이다.

"존명!!"

인피면구의 남자는 대답과 함께 그 자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호패는 남자의 인기척이 완전 사라지자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에 닿는 것은 늑대무리에게 뜯겨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아들의 시신이었다.
호패는 잠시 시신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순간 그의 두 눈에서 무시무시한 살기가 폭사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인간이 발한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의 어마어마한 분노였다.

'비설옥.. 정말 이것이 비설옥의 소행이라면...'
우드득..

매섭기로 소문난 북설산의 한풍마저 얼릴 듯한 섬뜩한 소리..
살기를 가득 담은 두 주먹이 우는 소리였다.
호패는 얼마나 세게 물었는지 자신의 입술이 터져 피가 나는지도 모른 채 그 자리에 서서 아들의 시신을 내려다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본좌의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이 지긋지긋한 악연을 종결시키고야 말겠다!!"

누구를 위한 독백일까..?
잠시 말없이 시신을 바라보던 호패는 곧 미련 없이 돌아서서 설원을 성큼성큼 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그제야 호패의 살기에 눌려 곳곳에 숨어있던 늑대무리들이 슬금슬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북설산에 정체불명의 세력이 나타나 백모곡의 결계가 모두 깨어진다. 이 일로 인해 도제의 심기가 크게 불편해지다."

-무림사기 천신비사전 : 제 1편 [사파전 2장]

2. 습격

진자성의 발걸음이 이토록 무거웠던 적은 그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래 처음일 것이다.
그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애써 움직이기 위해 무던히도 많은 노력을 했지만 무겁게 가라앉은 그의 착잡한 심정은 천근의 무게와도 같이 그의 몸마저도 짓누르고 있었다.
괜히 애꿎은 술병만 자꾸 홀짝거리게 된다.

마지막 한 모금...
오늘만 지나면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으리라..
바싹 타는 마음은 미칠 듯한 갈증을 호소하고 있지만 하루는 무던히도 길고 술병의 술은 너무나도 빨리 바닥이 났다.
진자성은 입술이 바짝 말라옴을 느끼며 무겁게 발걸음을 떼었다.
전서구에 따르면 그들이 도착할 시간이 거의 가까워졌다.
저 멀리 무언가가 다가오는 것이 보인다.
그것은 긴 행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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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가마의 행렬은 길었다.
눈에 보이는 짐작으로만 어림잡더라도 십리정도는 가뿐하게 넘을 듯 했다.
본래 신부가 타고 가는 가마의 행렬은 길기 마련이지만 이렇게 긴 행렬은 좀처럼 구경하기 힘들기에 가마의 행렬을 지켜보는 이들은 저마다 감탄을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휘황찬란한 금박을 입히고 갖가지 보석과 붉은 비단으로 장식한 화려한 가마의 자태는 물론이거니와 어림잡아도 서른은 족히 넘을 듯한 수레에 가득 쌓여 있는 칠기로 장식된 예물상자들과 각종 고급 비단들 또한 보는 이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든다.
그러나 이들의 행렬이 눈길을 끄는 가장 큰 이유는 그 엄청난 규모만은 아니었다.
가마의 행렬을 이루고 있는 무인들.
악기를 매고 있는 자들도 있고 중부무림에서는 볼 수 없는 이상한 모양의 무기라던가 도신이 비정상적으로 긴 칼 등 상식을 벗어난 무기들을 장착한 자들로 가득하다.
각양각색의 갑옷과 기묘한 무기들로 무장한 괴이한 행색의 무인들이 긴 행렬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기에 만약 가마가 없었더라면 이 행렬은 전투를 치르러 나가는 군대의 행렬로 보였으리라.
대체 어떤 혼례식이기에 적게 잡아도 삼천 여명은 되어 보이는 무사들이 동원되었을까?

"지금부터는 백도천(白道天 : 사파인들은 백도심삼천을 특히 이런 식으로 부른다.)의 영역입니다. 관문을 넘어서면 가마의 호위를 위해 오천 여명의 정파 무사들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이제 아가씨의 안전은 저들이 책임질 테니 아무쪼록 무사히 도착하시길.."

가마 밖에서 이 행렬의 호위를 책임하고 감독한 비혼객(秘魂客) 수장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수고 많았어요."

의례적인 인사말을 짧게 내던진 능임은 잠시 가마의 휘장을 살짝 들어올려 그 틈새로 밖을 내다보았다.
며칠이 소요된 행렬이었을까..?
천지사방이 모두 하얀 눈으로만 뒤덮인 북설산의 풍경은 사라진지 오래다.
가마의 휘장 틈으로 보이는 바깥세상은 그녀가 살아왔던 곳과는 달리 푸르고 붉고 또는 노란 갖가지 화려한 색으로 치장된 낯선 세상이었다.
그러나 능임에겐 아름답게 치장된 새로운 세상의 모습은 그 어떤 감흥도 주지 못했다.
그녀는 나지막한 탄식과 함께 다시 휘장을 내렸다.

"어디 불편 하세요 아가씨?"

가마 밖에 있던 시녀 하나가 그녀의 탄식소리를 듣고는 묻는다.

"아니.. 그냥 피곤해서 그래.."
"차라도 한잔 구해올까요?"
"아니.."

능임의 대답에 시녀는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
시녀라고 하지만 그것은 관례상의 호칭일 뿐. 사실상으로는 비혼객에 소속된 여인들 중 최고수의 정예들로 이루어진 일류 호위들이었다.
모두 그녀의 부친이자 패왕파천련의 련주(聯主)인 도제(刀帝) 능예(凌刈)가 특별히 안배한 것이었다.
그랬다.
그녀는 천하가 우러러보는 패왕파천련의 금지옥엽(金枝玉葉)이었다.
이 엄청난 가마의 행렬과 그 규모는 그녀의 신분으로 보아 당연한 것이었다.
강호 역사상 유례없던 정. 사 간의 사돈결연(査頓結緣)!!
그 백년의 맹세를 위해 그녀는 검황 이세진의 장자인 이연웅의 처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역사적인 혼례를 앞둔 신부의 모습이 왜 이리도 우울해 보이는 것일까?
며칠을 이동했던 피곤함도 있겠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이유..
가마의 행렬이 관문에 가까워질수록 그 증상은 점점 심각해지고 있었다.

'그가 저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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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군(金虎軍) 제 일대장 진자성입니다. 지금부터는 저희가 본성까지 무사히 모셔드리겠습니다."
가마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능임은 순간 정신을 잃을 뻔했다.
왈칵 솟아오르는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모른다.

목소리..
그렇게 다짐했건만..

아아.. 님이시여..
나는 울지 않으리라..
울지 않으리라 매일같이 다짐했고
다짐했던 만큼 울었고
울었던 시간이 너무나 많았기에
내 눈물이 모두 말라버려 다시는 울지 않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꽉 다문 입술사이로 흐느껴 나오는 설움을 당신에게만은 들리지 않으려
핏기를 잃은 채 떨기만 하는 무력한 손으로 입을 가려봤지만
행여 그 틈새로 내 작은 어리석음이 새어나오지는 않을까하여
모든 것이 공허로 가득한 이 작은 공간 안에서
내가 얼마나 숨을 죽였었는지
당신은 알아서는 아니 되고
혹시 알더라도 모른 척 해주소서..
오늘의 상황을 만들어낸 야속한 신께서만이
무릎을 적시고 있는 이 어리석은 여자의 눈물을 아셔야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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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르르릉!!
쿠웅!!
쿠쿠웅!!
제 아무리 일신에 절정의 무공을 지니고 있는 고수라 할지라도 천길 낭떠러지를 타고 굴러 떨어지는 바위덩어리는 어찌할 수가 없다.
그것도 한 개가 아니라 수 십 여개가 떨어져 길을 가로막을 정도라면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다.
어찌나 큰 바위덩어리들이었는지 그것이 굴러 떨어질 때의 위압감으로 인해 선두에 선 무사들은 보고도 미처 피하지 못한 채 죄다 깔려죽고 말았다.
게다가 더욱 악재는 굴러 떨어진 바위들이 지들끼리 부딪치고 부서져 길목을 가로막는 거대한 담벼락을 형성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행렬이 멈추는 건 고사하고 대열이 흩어지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와아아아아아!!"

자고로 궁지에 몰린 적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데에는 함성만한 것이 없다.
그것도 적의 위쪽을 점령한 상태에서의 이런 함성은 이미 칠할 이상의 승률을 먹고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쌍방의 숫자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했다. 고의적으로 적의 책략에 걸려드는 유인계가 아닌 이상은 고도의 수련을 거친 병사들이라 할지라도 일단 적의 책략에 걸려들었을 때에 냉정을 되찾기란 쉽지 않은 법이기 때문이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호송대의 무사들은 제각기 당황하기 시작했고 우왕좌왕하는 틈을 타 정체불명의 적들이 몸을 날려 왔다. 적에게 선점을 내준 것도 모자라 진열의 정비 또한 흐트러진 것이다.
복면을 하고 있어 그 정체를 짐작하기는 힘들지만 적의 움직임으로 보아 이들은 어디선가 고도의 훈련을 거친 정예들이었다.

"가마를 호위하라!!"

누군가의 외침이 들리자 진자성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실 이제껏 살아있는 게 신기하게 생각될 정도로 그는 내내 넋을 놓고 있었다. 가마의 호송이 시작된 이래 꼬박 하루라는 시간동안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는 그 자신도 모를 정도였으니까...

"아가씨를 우선.. 크악!!"
"커억!!"
채챙..챙!! 차앙!!
퍼퍽!! 콰콰쾅!!

아수라장.
모두 일신의 무공을 익힌 고수들인지라 이들이 집단을 이루는 싸움은 그야말로 보는 이의 정신을 쏙 빼버리는 엄청난 난전이었다. 이런 난전 속에서도 진자성의 귀에는 이 한마디가 똑똑히 들려왔다.

"아가씨를 빼앗겨선 안된다!! 우선적으로 보호하라!!"
'그녀가 위험하다!!'

위급한 순간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얼굴.
순간 진자성의 눈앞에 펼쳐진 온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바위의 굉음과 죽어가는 자의 비명과 적들의 함성,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 등이 들리고 곳곳에서 피와 먼지가 뒤섞여 한치 앞도 보기 힘든 난장판이 되었지만 지금의 그에게 그런 것들은 전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아니 확실히 말하자면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지만 그것에 신경 쓸 틈이 없다는 말이 옳을 수도 있겠다.
오로지 그녀의 행방만이.. 연인(戀人)의 생사만이 그의 최대의 관심사였다.
뿌연 흙먼지 사이로 뒤엉키는 적과 아군들을 헤집고 진자성은 미친 듯이 가마의 행방을 찾아다녔다.
몇 명의 적들이 진자성의 앞을 가로막아보았지만 금호군 제 일대장의 직책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그는 거침없이 적들을 헤치고 나갔다.
그러나 가마가 있던 자리에는 부서진 잔해만이 남아있을 뿐.. 그가 애타게 찾던 능임의 행방은 보이지 않았다.
순간 진자성은 머릿속이 아찔해져 옴을 느꼈다. 두 다리의 힘이 풀려 하마터면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 했다.
그때 휘하의 부장 하나가 그를 발견하고는 외쳤다.

"적의 수는 많지 않습니다!! 진열을 정비시키고 어서 아가씨의 행방을..."

그러나 진자성에게 그의 외침이 들릴리 만무했다.

"아가씨는 어디에 있나?!!"

"예..?"
"아가씨는 어디 있냔 말이다!!"
"이..일대 철검부(鐵劍部)가 추적하고 있습니다만.."
파앗!!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진자성의 몸은 어느새 수 십 여명 되는 적들의 머리 위로 날아올랐다.

"저..저런..!!"
부장의 안타까운 외침이 터져 나왔다. 지금의 진자성이 보인 행동은 무모함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자고로 모든 무공은 안정적인 디딤을 밟고 있는 두 발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적과의 싸움에 있어서는 적의 머리 위를 점하고 있는 것이 유리한 것이지만 그것은 절벽 등의 지형적인 도움을 받았거나 무방비 상태의 적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힘을 이용했을 때에만 통하는 이야기이다.
지금의 진자성처럼 한참 전투를 치러 오감이 예민해진 적들의 머리 위를 뛰어넘는 것은 적의 반격에 대한 아무런 방어조차 할 수 없는 무방비상태나 다름없었다.

슈슈슈슝!!
아니나 다를까..
진자성의 몸이 허공에 뜬 채 허점이 노출되자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극도로 예민해진 적의 공격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마치 한 마리의 붕조를 잡기위해 허공으로 빗발치는 수 백 여개의 화살과도 같이 그들의 몸은 순식간에 진자성을 향해 쏘아지고 있었다.
순간 진자성은 자신을 향해 솟구치는 무리들을 똑똑히 보았다.
그리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붉은 그림자를 남기며 자신을 향해 쏘아지는 듯 날아오는 무리들..
그것은 너무나도 눈에 익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마신공월(魔神空越)?!!"

혈무교의 마신공월!!
독특한 혈영을 남기며 허공으로 쏘아지듯 날아오른 그것은 분명 혈무교의 상승신법인 마신공월이었다.

쐐애액!!

그러나 진자성이 놀랄 새도 없이 그들의 매서운 살초가 전개되었다.
동시에 쏘아져 들어오는 여섯 개의 공격. 그리고 그 뒤로 조여들어오는 여섯 개의 공격.
진자성이 비록 약관의 나이를 넘긴지 얼마 안됐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칼을 잡아 백전을 경험해온 남자였다.
선두의 여섯 명이 펼친 살초는 후방의 공격을 위한 미끼에 불과하다는 걸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하나가 무시 못 할 살초들인데다 그는 발조차 디딜 수 없는 허공에 있는 상태인지라 쏘아지는 가속력을 이용한 그들의 공격을 도무지 막아낼 재간이 없었다.
그 중에서도 그의 등 뒤에서 명문혈(命門穴)을 노리고 세 번째로 들어오는 일장이 가장 위협적이었다.
순간 떠오르는 한 사람의 얼굴..

'훗.. 이런 와중에도..'

순간 진자성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건 스스로를 향한 조소였다.
자신의 목숨이 위급한 이 찰나의 순간에도 단 한사람의 안위만이 떠오르는 자신이 너무나도 우습고도 처량하게 여겨졌던 것이다.
아무래도 모험을 해야 할 듯 했다. 진자성은 결심을 굳힌 듯 허공에서 자신의 몸을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까강!!

그의 벽무도가 요란한 섬광을 뿜어내며 적의 첫 번째 공격과 두 번째 공격을 막아내었다.
하지만 진자성의 명문혈을 노리고 들어온 세 번째 일장은 여전히 집요하게 그를 압박해왔다.
피할 수는 있었지만 진자성은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신으로 진기를 끌어올려 벽해탄강을 극성으로 펼쳤다.

퍼엉!!

요란한 굉음과 함께 진자성의 등에 치명적인 일장이 적중되었다.
그러나 그 순간, 진자성을 공격했던 복면인의 두 눈은 경악으로 인해 튀어나올 듯 부릅떠졌다.
적의 일장이 진자성의 등을 가격하며 벽해탄강을 펼친 반발력과 크게 충돌하고 그 충격으로 진자성의 몸이 순식간에 이십 여 장도 넘게 튕겨나갔기 때문이다.
진자성이 반격하리라 예상했었던 그의 생각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사실 글로 쓰기에는 이 모든 상황은 너무나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들이었다.

"!!"

진자성을 향해 쏘아져가던 적들 모두 그의 수법에 경악을 금치 못하는 눈치였다.
기세 좋게 날아가던 그들의 살초는 모두 보기 좋게 허공을 가르고 그들 모두는 허무하다는 듯 바닥에 내려선 채 진자성이 사라진 방향만을 보고 있었다.

"독한 놈..!!"

진자성에게 일장을 날린 자가 복면 속의 눈빛을 무섭게 번뜩였다.
"어떡할까요? 보아하니 그 여자를 되찾으러가는 눈치인데.."
옆에 있던 남자의 물음에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쫓아갈 필요는 없다. 우리는 여기서 적당히 놀다가 계획대로만 하면 되는 거야. 흐흐흐.."

"우욱.."
뱃속이 마치 초열지옥의 화염을 마신마냥 뜨겁다.
진자성은 내장이 뒤틀리는 듯한 역한 고통을 느끼고는 급기야는 참지 못해 피를 토하고 말았다.
검붉은 핏덩이가 꾸역꾸역 밖으로 쏟아져 나오자 그의 안색은 급도로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벽해탄강을 극성으로 펼침과 동시에 상체를 약간 틀어 급소에 치명적인 일격은 피했지만 그래도 무시할 수 없는 내상을 입었다. 상대의 공력을 5할 이상 와해시켰지만 나머지 절반의 위력으로도 이정도의 내상을 입혔으니 상대는 분명 만만찮은 내공의 소유자가 틀림없었다.

'이건 분명...!!'

눈앞이 뿌옇게 변해가는 것을 느끼며 진자성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경악 속에서 한 가지 불길한 의구심이 드는 것을 느꼈다.
혈무교의 신법을 펼치는 적의 무리도 의문이지만 조금 전 진자성을 가격했던 이 일장은 분명 양강지기를 바탕으로 한 정파의 무공이었다. 그것도 극양지기의 장법!!
그가 알기론 정파무림에서 이 정도의 극양지기의 장법을 펼칠 수 있는 인물은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가 존경해마지 않는 도원호법 관상을 비롯해 사대호법의 한명인 탁탑천왕 탁응, 염왕쌍장 적송자, 웅차신권 등...

'그럴 리가 없다..'

진자성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들 모두가 완벽한 군자라고는 할 순 없는 인물들이지만 그래도 하나같이 악을 원수처럼 미워하고 그만큼 많은 협행으로 이름을 날린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의문이 꼬리를 물고 있었지만 진자성은 이내 그 의문들을 떨쳐버렸다.
지금의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능임의 생사였다.

아아.. 그녀는 어찌 되었을까?
쿨럭.. 쿨럭...

발걸음을 떨치기가 무섭게 현기증을 동반한 객혈(喀血)이 시작되었다.
운기조식을 통해 거꾸로 치솟는 기혈을 가라앉힐 수야 있지만 지금의 그에게 그러고 있을 시간 자체가 크나큰 사치였다. 그는 가벼운 심호흡을 통해 일시적으로 기혈을 가라앉히고는 벽무도의 자루를 힘껏 고쳐 쥔 채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를 뒤로하고 바라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짙푸른 것이 유난히도 심술 맞게 보인다.
갑자기 진자성은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본래 감상적이고 우유부단한 성격의 그였지만 이제껏 전장에서 이런 기분을 느낀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그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는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살아만 있어다오. 내 벗을 위해.. 너를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소리 없이 나온 눈물이 미련한 사내의 두 볼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살아만 있게 해 주십시오.
이 보잘것없는 인간이 살아왔던 이유였고
또한 살아가야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단지 죄라고 한다면 못난 사내에게 마음을 준 것이 죄겠지요.
남의 사람이 되어 떠나는 먼 발길
고이 보내지 내 옹졸함이 안쓰러웠는지
행여라도 이 못난 사람이 들을까 싶어
소리 죽여 울던 그런 여자입니다.
그냥 살아만 있게 해 주십시오.
평생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과하다고 여기신다면
한 줌 재로 세월 안에 흐트러지는 기억이 된다 해도 좋으니
제발 간절히 바랄진대 살아만 있게 해 주시옵소서.

"역사적인 정.사 무림간의 사돈 결연이 이뤄지다. 신부의 가마를 옮기던 중 정체불명의 적에게 습격당하나 진자성의 활약으로 가마는 무사히 호송. "

-무림사기 천신비사전 : 제 5편 [정파전 1장]

3. 유혹

"당신의 믿고 있는 것들에... 얼마만큼의 자신이 있나요..?"
신비로운 매력을 발산하는 검은 옷의 여인이 이연웅에게 물었다.
그로서는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난데없이 나타난 미녀의 등장 그 자체도 어리둥절하지만 그녀가 던지는 질문 또한 어리둥절하게 만들기는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마침 기분도 울적하고 혼자 술을 마시기에도 적적했던지라 그는 눈앞에 나타난 미녀를 흔쾌히 맞아들였다.

"허허.. 웬 뜬금없는 질문이오..? 이쪽으로 앉아 술이나 한잔 하십시다."

검은 옷의 여인은 신비스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이연웅의 옆에 바싹 붙어 앉았다.

향기..
특이하면서도 강렬해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은 향기가 이연웅의 코를 자극한다.
검은 옷의 여인은 아무 말 없이 이연웅이 술을 주면 주는대로 받고 달라고 하면 군소리 없이 따라주었다.
상황이 이정도가 되면 어떤 남자든지 술맛이 극에 달해 술이 잘 넘어가는 법이다.
이연웅은 간만에 기분 좋게 술을 마셨다.
사실 그는 최근 들어 술을 마시는 일이 잦았고 그만큼 그의 기분은 항상 가라앉은 상태였다.
얼마만에 마셔보는 기분 좋은 술인가..?
그러나 뭘까.. 유쾌하게 술은 들어가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 여전히 가라앉지 않는 이 분노는..?
스스로에 대한 혼란 속에서 마시는 술로 인해 이연웅의 의식은 점점 몽롱해져가고 있었다.
자신이 취한 것인지 꿈꾸는 것인지조차 모르는 취생몽사의 지경에까지 이르러 멀어져 가는 의식 속에서 여인의 달콤한 독백만이 어지럽게 머릿속을 맴돌았다.

-너무 많이 닮았어..-

모든 것을 다 감내할 수 있다고 여겼었지만..
옛 사람을 잊지 못하는 여인을 곁에 둔다는 것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진자성이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온 그날.. 생사를 헤매는 친구를 보며 이연웅이 밤을 새워 울었던 그 이상의 날들을 능임은 울다 지쳐 쓰러졌었다.
이제는 자신의 아내가 된 여인이 다른 남자를 위해 울던 것을 보는 심정은 예상하고 각오했던 것 이상으로 씁쓸한 것이었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려했지만 현실은 그렇지를 못했다.
어딘가 의무적인 듯한 능임과의 관계는 이연웅의 의지를 꺾어놓기에는 충분했고 그럴수록 그녀에게 느껴지는 것은 진자성의 존재였었다.
그제야 이연웅은 자신이 좀 더 일찍 깨닫지 못한 사실 하나를 알게 되었다.
그의 부친인 이세진 이상으로 자신에게 열등감을 준 존재가 바로 가장 친한 친구인 진자성이였음을.. 이것은 오래전부터 그의 마음 속 한 구석을 누르고 있던 불쾌감이었으나 그 어떤 것보다도 발견하기 힘들었던 부분이었기에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그가 느끼는 혼란은 예상 이상의 것이었다.
누구보다 친하고 자신보다 소중했다고 여겼던 친구라고 믿었건만..
자신은 그 이상으로 친구를 질투하고 있었던 것이다.
많은 것이 힘들었다.
스스로의 모습이 너무나도 옹졸하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이 순간.. 진자성이 몸을 회복해 그의 이야기를 들어줬으면 하고 생각했지만 하늘이 무심한 건지 운명이 얄궂은 것인지 진자성의 몸은 쉽게 회복되지를 않았다.
스스로가 못난 놈이라고 끊임없이 질책하면서도 이연웅은 술에 의지하고 현실에 지쳐가는 날이 많아졌다.

-친구여.. 내 아내의 마음속에 남긴 자네의 흔적이 나를 얼마나 작게 만드는 것인지 알고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