遲日江山麗 (봄 햇살에 강도 산도 아름답고)
春風花草香 (봄바람은 꽃과 풀의 향기 전해준다.)
泥融飛燕子 (얼었던 진흙 녹아 제비는 둥지를 지으러 날아다니고)
沙暖睡鴛鴦 (따뜻한 강가 모래벌에는 원앙이 잠을 자고 있구나.)
무신력 460년 6월에 이른 어느 날이었다. 봉래산에는 막바지 봄과 초여름의 기운이 한창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검황 이세진은 연웅과 능임에게 나들이를 제안했다.
두 사람의 나들이 소식은 삽시간에 퍼졌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 나들이에는 백도삼십천과 패왕파천련의 양 본좌들도 함께하기로 한 것이다. 당대 석학들의 당시 글들을 보면 하나같이 “돌이켜보건데, 천하가 이처럼 평온했던 적이 없었다.”라고 말했다.
정파 - 사파 - 마교간의 끊임없던 분쟁은 그 어느 때보다 잠잠했다. 정파 - 사파간의 사돈결연은 천하를 뒤흔들만큼 영향력이 거대했다. 이는 백도삼십천과 패왕파천련간의 잠정적인 동맹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양 세력의 친목은 혈무교의 입장에서 달가운 것이 아니었다. 어떤 반응을 보여야할지도 난감한 상황일 것이다. 사돈결연을 방해한 정체불명의 세력이 혈무교일 가능성이 지배적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거기에 항세신군도 도주해버렸다. 마존 혈무패왕에게 있어서 가장 머리아픈 시기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 태연스러웠다. 오히려 모든 것이 자신의 뜻대로 되어가는 것 같은 여유가 흘러넘쳤다. 지켜보고 있던 검은 옷의 여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신감이 넘치는군요.”
“흐흐흐. 본좌가 천하를 평정할 날이 슬슬 보이기 시작하니 당연한 것 아닌가, 소목!”
그렇다. 검은 옷의 여인. 그녀는 혈무패왕 이전에 마도 최고의 고수였던 명왕신군의 딸, 소목이었다. 훗날 ‘당대 강호에서 가장 음란한 마녀’라 불리게 되는 악명 높은 여인이었다.
“그래서? 그들과 친히 함께 자리를 하실 건가요?”
“하하하하!”
혈무패왕은 호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그의 모습에서 소목은 요염한 미소로 답하였다.
‘역시, 오무자 중에 가장 능구렁이 같은 자이다. 절대 방심해서는 안되겠다.’
호쾌하게 웃고 있는 혈무패왕 이었지만, 그의 두 눈빛은 소목의 속마음을 뚫어보고자 하는 기운이 가득했다. 그 역시, 소목이라는 여인에 대해 상당히 경계하는 것이었다.
잠시간의 정적 끝에 그는 가슴에 품고 있던 검 한 자루를 그녀에게 건넸다. 건네받은 소목은 조심스럽게 검집에서 검을 꺼냈다. 날카롭게 제련된 검이 무척이나 아름다워 보였다. 그러나 소목의 눈에는 그 아름다움 뒤에 뿜어져 나오는 검디검은 사악한 기운이 뚜렷하게 보였다.
“어째서 4대 마검(四代 魔劍)인 것인지요?”
소목의 목소리는 짜증스러움이 섞여있었다. 본디 마검은 현 혈무교 최고 장인인 표맹철공 등보성의 증조부 파열마(破裂魔)에 의해 만들어진 사악한 기운의 검이다. 검으로서의 극한에 완성도를 자랑하며, 주인에게 막강한 힘을 부여하지만 반드시 주인을 파멸의 길로 인도하는 저주받은 명검이었다. 파열마는 노년에 마검을 8자루를 만들고 세상을 떠났는데, 그 완성도에 따라 최고를 1대(一代)로 하여 순서대로 대(代)가 붙었다. 즉, 지금 혈무패왕이 건넨 마검은 서열 4번째의 막대한 힘을 가진 마검인 것이었다. 그러나 소목의 눈빛은 뭔가 부족하다는 듯 했다.
“충분하고 남을 것이외다.”
“하지만…….”
그녀는 혈무패왕의 살기어린 눈빛을 보고는 순간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그녀에게 있어서, 그는 아직까지 활용가치가 풍부한 자원이었다. 벌써부터 내분이 일어나면 안되는 것이었다. 그녀는 다시금 싹싹한 모습으로 돌아와 말을 돌렸다.
“이번 나들이에, 마존께서 직접 가시는 건지요?”
“본좌가 간다면, 필히 성가신 일들이 생기겠지. 마교 내의 극우파들의 반감도 꽤 클것이고 말이야.”
지난 신부 가마 습격사건은 마교 내에의 극단적인 무리들이 벌인 소행이었다. 그도 어느 정도 예상한 바이기에, 크게 놀랄만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세력 내부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 만큼, 어느 정도 그들의 심중도 헤아려줄 필요는 있었다.
“통천군 왕렴이 선발한 인재들이면 충분하겠지.”
그의 말에 소목도 납득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연웅과 능임의 나들이는 실로 대단한 규모였다. 나들이라기 보단, 대외적인 행사라 해야할 것이다. 나들이 구경을 나온 수많은 무림인들이 연웅과 능임의 모습에 환호를 보냈다. 모두가 기뻐하고 즐거워했으나, 정작 주인공인 연웅과 능임은 마음이 많이 불편했다. 멀리서 검황을 호위하고 있는 진자성은 한번도 그들에게 눈빛을 주지 않았다. 도제를 비롯한 패왕파천련 일파들과, 초대받은 마교의 몇몇 무리들로부터 검황을 지키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울 뿐이었다.
그런 그의 모습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지만, 능임은 왠지 아쉬웠다. 그리고 그런 아쉬운 빛이 흐를 때마다 연웅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나들이는 무사히 끝났다. 검황의 보호를 위해 과도할 정도로 예민해져있던 진자성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직 몸이 완쾌된 것도 아니었다. 휴식이 필요하다 생각하여 서둘러 숙소로 향하던 중, 정원호법 탁응이 마교의 대사들과 이야기 나누는 것을 보게 되었다. ‘나들이를 핑계로 세력간의 외교적인 문제일 것이다. 지금은 내 몸을 챙기는 것이 우선이다.’ 라고 생각하고는 조용히 그 자리를 지나쳐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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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좀 나갔다 오겠소.”
연웅은 별채 밖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능임은 괴로웠다.
이미 자신은 이연웅과 백년가약을 맺은 몸. 진자성에게 눈빛을 돌리는 것이 잘못 된 것이란 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한번도 눈을 마주치지 않는 진자성의 모습을 볼수록 더더욱 그에 대한 그리움은 넘쳐갔다.
차라리 연웅이 자신에게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준다면, 그를 잊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연웅에게 있어서의 ‘진자성의 친구’라는 입장 덕에 미지근한 반응뿐이었다.
밤하늘에 외롭게 떠있는 달빛은 능임을 더욱 쓸쓸하게 만들었다. 어디서부터 얽혀버린 것인가? 생각할수록 고통만 더해갈 뿐이었다.
“아가씨, 뭘 그렇게 고민하고 계신 겁니까?”
정원호법 탁응이 그녀의 뒤편에 서 있었다.
“타지에 생활이 적응하기 힘드시겠지요. 바람 쐬기 좋은 장소를 알고 있습니다. 패왕파천련에서 오신 분들께 받은 차도 가져왔습니다.”
그는 자신과 이연웅의 혼사를 적극적으로 주선한 장본인이었다. 여타 호법들과는 달리, 지나치게 능임에게 잘 대해줬다. 그런 부분에서 석연찮은 점이 많았다.
“고마워요.”
건네 받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과거에 마시던 차와는 느낌이 조금 달랐다. 묘하게 중독성이 있었다. 생각보다 빠르게 찻잔을 비워버렸다. 뺨에는 붉은 빛이 감돌았다. 그리고 그렇게 정신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같은 시각, 진자성은 숙소에 도착하자 큰 대자로 뻗어버렸다. 능임에게 시선을 주면 마음이 흔들릴지 몰라서, 오로지 검황의 신변보호에만 신경을 곤두세웠던 탓이었다. 술 생각이 났다. 하지만 더 이상 술에 의지할 수 없었다. 나약 해져가는 자신의 모습을 참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한잠 자기 위해 눈을 감고 뒤척거렸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마음을 추스를 시간과 휴식이다.”
간신히 마음을 다독였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파아아악!!
화살이 창문을 깨뜨리고 들어왔다. 화살에는 조그만 쪽지가 묶여져 있었다.
쪽지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써있었다.
- 능임을 살리고 싶다면, 지금 당장 곡천리 방향의 폭포 밑으로 와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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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웅은 지난번에 만났던 검은 옷의 여인을 떠올리며 같은 장소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낮에 봤던 능임의 눈빛과 그것을 외면하는 진자성의 모습에서 쏟아져 나온 고뇌들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지금 그 역시, 진자성과 마찬가지로 시간이 필요했다. 많은 시간만이 그의 고민거리들을 덮어줄 수 있었다. 흥을 내보고자 기억나는 노래를 불러봤다.
“終日看山不厭山(종일토록 산을 보아도 물리지 않으니) 買山終待老山間(산을 사서 이 속에서 늙고 싶다.) 山花落盡山長在(꽃은 다 떨어져도 산은 늘 그대로이고)…….”
한참 시를 이어갈 즈음, 갑자기 그의 왼쪽 숲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山水空流山自閑(산 속의 물 헛되이 흐르나 산은 고요하도다.)”
연웅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검은 옷의 여인이었다. 그는 웃기 시작했다. 즐거움의 미소가 터져 나왔다. 자신이 알고 있는 시를 외워 받아 쳐줄 여자가 있을 것이란 걸 전혀 예상치 못했었다. 요염함이 가득 풍겨져 나오는 그녀에게 지적인 매력까지 있을 줄이야! 그는 점점 검은 옷의 여인에 매력에 빠져들고 있었다.
“이런 달밤에는 역시 백도십삼천의 ‘무릉도원’을 구경하고 싶어지지요. 저를 따라오세요.”
그녀는 아름다운 한 마리의 흑나비처럼 나풀거리듯 앞서나갔다. 연웅은 귀신에 홀린 것처럼 천천히 그녀를 따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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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래산 군웅성을 나서 북동쪽으로 가면 제법 큰 계곡이 있다. 그 계곡의 물줄기는 한 폭포로부터 시작되는데, 그 폭포는 곡천리를 향하는 곳에 위치해있었다. 한낮에는 폭포와 계곡의 물줄기 사이로 종종 무지개를 구경할 수 있으며, 물도 매우 맑았다. 이곳의 경치는 그야말로 절경인데, 많은 무림인들이 하나처럼 입을 모아 “무릉도원이 바로 이곳이다!”라 칭송할 정도이다. 그런 절경들 사이로 진자성은 무서운 살기를 품은 채 지나치고 있었다.
‘어떤 놈인지 모르겠지만, 결단코 용서치 않으리!’
폭포에 도착하자, 비친 능임의 모습이 보였다.
‘능임!’
먼저 냉정하게 주변을 둘러봤다. 주변에는 어떠한 기압이나 살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능임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녀는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온몸에는 비정상적으로 뜨거운 열을 내품고 있었다. 반쯤 돌아간 눈동자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줬다.
우선은 급한 대로 그녀를 폭포수 물에 담궈 열을 식히는 응급조치를 취했다.
‘독인가?!’
서둘러 그녀의 맥을 짚었다. 매우 비정상적이었다. 여타 독들과는 약간 다른 느낌이었다.
‘설마?!’
이번엔 조심스럽게 그녀의 목 부위를 살펴봤다. 붉은 점 6개가 또렷히 보였다. 그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화사육점(花蛇六點)이었다. 뱀의 이빨자국 형태의 6개 점이 목부근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틀림없었다. 몇 달 전부터 무림에 보이기 시작한 새로운 형태의 음독이었다.
당한 자는 온몸에 오직 성욕만으로 미치게 되며, 시간이 지날수록 점은 하나씩 사라진다. 점이 하나씩 사라질 때마다 오장(五臟)이 하나씩 심대한 타격을 입으며, 모든 점이 사라지면 반드시 숨을 거두는 사악한 독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직까지 점이 하나도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만약 점이 하나라도 사라졌다면, 오장중 하나에 큰 타격을 입었다는 것. 설사 해독을 한다 해도 감당하기 어려운 부작용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해독하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패왕파천련의 신찰의원 예목이 가지고 있다는 천년목(千年木)으로 만든 환(丸)을 먹이는 것이요, 마지막 하나는 중독자에 상반되는 음양의 기운을 주입하는 것이었다.
진자성은 잠시 고민했다. 마지막 방법은 썩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첫 번째 방법이 가장 좋은 듯하지만, 시간이 촉박했다.
과거 검황에게 하사 받았던 천명흑피화(千鳴黑皮靴)와 경공 - 건곤등룡(乾坤登龍)을 활용하면 아슬아슬하게 북설산 패도성에 도착할 것 같았다.
능임을 부둥켜안고 자리에서 일어날 즈음이었다. 매혹적인 향기와 함께 흑옥빛의 무엇인가가 지나갔다. 너무도 빠른 순간이라, 그 정체를 확인할 겨를도 없었다. 따끔하는 아픔이 목에 전해졌다. 침이었다.
“이, 이것은?!”
진자성은 서둘러 목의 침을 빼내었다. 검은 옥으로 만든 섬세하면서도 아름다운 침이었다.
검황에게 들은 바가 있는 물건이었다. 과거 마도 최고수였던 명왕신군이 즐겨 썼다는 침의 모양새가 똑같았다. 다수의 혈을 제압하거나 강력한 독이나 미약을 특정 대상자에게 주입할 때 사용하는 것이 주용도라 하였다.
우선 자신의 상태를 알아보는 것이 중요했다. 진자성은 침착히 두눈을 감고 기를 내뿜어봤다. 기의 흐름을 보아, 독은 아닌 듯 하였다. 그렇다면 미약일 가능성이 높았다.
향기로운 꽃향기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능임과의 옛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때마다 그녀를 원하고, 갈망하던 욕망의 그림자가 그의 머릿속을 어둠으로 뒤덮어갔다.
“으아아아아아악!”
머리를 붙잡고 크게 나뒹굴었다. 하지만 좀처럼 뜨거워진 몸은 식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서둘러 북설산 패도성으로 가야 한다. 안 그러면……. 안 그러면!!!’
미약의 잠식속도를 힘겹게 억누르던 그에게 이제는 헛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사랑에는 친구도, 스승도 필요 없는 것이야. 넌 능임을 사랑하잖아? 그리고 능임도 널 사랑하잖아? 사랑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어떠한 역경도 이겨낼 수 있는 것 아니냐?”
마음속의 또 다른 자신이 큰 소리로 진자성을 뒤흔들었다. 크게 고개를 저어보지만, 그것도 한계에 도달했다.
“잘 생각해봐. 너는 지금 하늘이 내린 기회를 얻은 것이야. 북설산에 가는 중에 그녀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떻게 되는 거냐? 이런 옳은 기회에 못 먹을 떡에 침이라도 뱉어보는 거잖아? 너는 그녀를 구하기 위한거야. 그리고 너는 그녀를 사랑하잖아? 네 본능에 충실해. 알겠냐? 이 얼간아!!!”
“그, 그래. 나는 그녀를 구하기 위해. 그녀를 구하기 위해! 우헤헤헤헤헤!!!”
그의 눈빛은 야수의 것으로 돌변했다. 젖어있는 그녀의 옷을 갈기갈기 찢어나가기 시작했다.
한편 간신히 정신을 차린 능임은 침을 질질 흘리며 돌진해오는 진자성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그는 거침없이 그녀가 알몸이 될 때까지 짐승처럼 덤벼들었다. 뭐라고 저항하고 싶었지만, 음독에 몸이 제압된 상태라 힘을 낼 수 없었다. 눈물만 흘러내릴 뿐이었다.
몸과 몸이 뒤섞였다. 거친 호흡만이 오갔다. 절정에 이르자 능임은 외마디 비명소리와 함께 입에서 검은 피를 쏟았다. 목에 있던 붉은 점들은 한꺼번에 사라져버렸다. 몸에 있던 열도 급격히 떨어졌다. 겨우겨우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된 능임이 구슬프게 울음을 터트렸다. 그 소리를 듣고서야 겨우 진자성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진자성!!! 네 이놈!!!”
폭포 부근의 숲에서 호통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그는 주변을 살펴봤다.
이연웅이었다. 그는 새빨갛게 질린 표정으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알몸이 되어 구슬프게 울음을 터트리는 능임의 모습과 이리저리 흐트러진 진자성의 옷차림은 연웅에게 어떻게 설명하더라도 이해시킬 수 없는 광경이었다.
연웅은 주저없이 검을 뽑아 들었다. 아무리 친구의 옛 애인이었지만, 지금은 자신과 백년가약을 맺은 여인이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는 그의 손으로 갔고, 그 손은 칼집을 향했다. 억눌린 감정의 폭발! 그에게 있어서 지금은 살인귀 같은 살기만이 감돌 뿐이었다.
그렇게 엇갈린 운명의 실은 더욱더 엉켜 져갔다.
바람이 차가웠다. 만월(滿月)이 오늘처럼 오만스럽게 보인 적이 없었다. 연웅의 눈에는 굵다란 눈물들이 쏟아졌다.
그의 얼굴에는 커다란 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패배’
사랑에서도, 실력에서도 완패였다. 그에게 있어서 진자성은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아내인 능임의 마음도, 정절도 빼앗겼다. 먼저 검을 뽑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뻗어있는 모습이 꼴사나웠다.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힘은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진자성은 연웅에게 뭐라고 변명할 수가 없었다. 한다고 하더라도, 설득시킬 자신이 없었다. 정확한 자초지종(自初至終)을 알 도리는 없었지만, 누군가의 계략에 의한 것이 분명했다. 한심했다. 금호군 제일대장이라는 직책이 한없이 무겁게만 느껴졌다. 연웅과 능임의 혼약에 대해 하늘을 향해 통곡했던 적이 있었다. 시기심 때문에 모든 것을 다 부숴버리겠다고 남몰래 외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말이 씨가 되어버렸다. 자신은 가장 친한 친구의 가정을 파괴했고, 강호를 발칵 뒤집어버릴 일을 저질러버린 것이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이었을까?
“미안하다. 연웅.”
진자성은 자신의 웃옷으로 능임을 감싸고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연웅은 마지막 힘을 다해 고함을 질러봤다. 부질없었다. 아내 능임에게 느끼는 배신감. 진자성에게 짓밟힌 우정과 자존심. 울화통이 치밀어 올랐다.
“이런, 이런. 가여워라.”
비참하게 쓰러져있는 연웅에게 소목은 속삭이듯 말했다. 그녀는 그를 일으켜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묻히고는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연웅은 큰 소리로 울음을 터트렸다. 아버지는 절대 눈물을 함부로 보여서는 안된다고 당부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을 안고 있는 검은 옷의 여인이 마치 어머니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더더욱 울음을 터트리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소목은 미소 지었다. 그리고 말했다.
“제가 힘을 보태어 드릴까요?”
“?!”
연웅은 갑자기 눈물을 그치고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의 눈빛은 마치 구원자 같았다. 그윽하면서도 자애로워 보였다. 연웅의 표정이 점점 응석받이 어린애처럼 변하자, 소목은 속으로 웃었다. 그녀는 천천히 등뒤에 숨겨뒀던 4대 마검을 보여줬다.
“각오가 있다면, 이녀석을 당신께 드리지요.”
“그, 그 검은?!”
그녀가 들고 있던 검은 섬뜩할 정도로 세밀했다. 특히 검날의 문양들은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하지만 이글이글 검게 타오르는 듯한 사악한 기운은 검의 모든 매력들을 일순간 두려움으로 바꾸기에 충분했다. 검집에 희미하게 새겨져 있는 파열마(破裂魔)라는 글자를 보자,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연웅은 확신했다.
‘틀림없는 마검이다!’
“알고 있군요? 파열마의 마검에 대해…….”
그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그가 어렸을 적 일이었다. 검황이 혈무교와의 가벼운 교전에 그를 데리고 간 일이 있었다. 연웅에게 강호에 대해 어느 정도 깨우쳐줄 때가 왔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날의 교전은 막바지에 접어들어 결코 가볍게 끝나지 않았다. 정파 호법들의 반정도 내공을 가진 최후의 마교 생존자가 절규하면서 한 검을 뽑아 들었다. 주위 사람들은 모두 “마, 마검이다!”라고 소리쳤다. 검을 뽑아 든 자는 이내 어두운 기운에 휘말려버렸다. 그리고 피눈물을 흘리며 검황을 향해 돌진했다. 이에 군자도 위천삼이 재빨리 가로막았다.
“치이이이이이이익!!!!!”
금속의 긁히는 소리가 고막을 터트릴 것만 같았다.
“챙! 챙! 츄와아악!!!”
몇 합이 오고 갔다.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을 것 같던 마지막 생존자가 갑자기 도군부(刀君部)의 부주(部主)와 대등할 정도로 싸움을 전개해갔다. 아니, 분명히 약간이긴 하지만 위천삼이 밀리고 있었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검황이 어린 연웅에게 이야기했다.
“저 검은 혈무교의 백수광인(白首狂人) 파열마(破裂魔)가 만든 마검(魔劍)이다. 마검은 막대한 힘을 부여하지만, 그 힘을 제압할만한 주인이 아니라면 언젠가 반드시 그 주인을 잡아 먹어버린다. 무서운 검이지. 무엇보다도 가장 무서운 것은…….”
이야기를 하는 동안 밀리고 밀리던 위천삼이 결국 허점을 보이고 말았다. 마검은 무섭게 위천삼의 넓직한 복부를 향해 돌진했다.
팟!
검황은 순식간에 도약하여 위천삼의 머리를 뛰어넘었다. 그리고 사뿐히 마검을 지르밟았다. 다시금 통하며 도약한 검황은 우아한 원을 그리며 왼발로 적의 목을 타격했다. 급소를 완벽히 공략했다. 그는 순식간에 마검을 떨어뜨리고는 미친듯이 비명을 지르다가 피를 토하며 숨을 거뒀다.
“하하하하! 8대 마검(八代 魔劍)이라……. 예상외의 훌륭한 전리품을 얻었구나!”
검황은 마검을 꼼꼼히 살펴보며 흡족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검집에 마검을 넣은 뒤, 품속의 붕대들로 칭칭 봉인하면서 중단되었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 검에 당한 자들은 하나같이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져버린다는 것. 그것이 가장 무서운 점이지.”
마검은 총 8자루라고 한다. 그중 8대 마검은 전리품으로 검황의 방 어디엔가 숨겨져 있다. 그렇다면 지금 소목의 이 마검은 그때 그 8대 마검보다 더 상위의 마검이 분명했다.
“몇대 마검인지?”
“4대 마검이랍니다.”
“4대 마검?!”
언젠가 도원호법 관상이 마검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8자루의 마검들은 그 완성도에 따라 최고를 1대(一代)로 하여 순서대로 대(代)가 붙는다는 것이다. 세대 마다 곱절 이상으로 힘의 차이가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어렸을 적에 봤던 8대 마검과 비견하여 터무니없이 강력한 힘을 가진 마검이 분명했다.
겁이 났다. 지금도 선명히 보이는 사악한 기운들이 금방이라도 자신을 덮쳐버릴 것만 같았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연웅에게 소목은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아직까지 당신한테 남은 것이 있나요?”
“……!?”
그는 이내 고개를 떨궜다. 남아있는 것이 없었다. 우정도, 사랑도, 믿음도, 자존심도 무참히 짓밟혀버렸다. 훗날 ‘검황의 아들은 진실로 무능한 자였다.’라고 평가 받는 것이 무엇보다도 싫었다.
소목은 거침없이 그의 입술을 훔쳤다. 혀와 혀가 마주치자, 환각에 빠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다시금 그와 거리를 뒀다. 그녀의 요염한 미소는 그에게 숨어있던 자신감을 이끌어내기 충분했다.
연웅의 눈빛에는 더 이상 주저함이 없었다. 소목은 예를 갖추며 마검을 연웅에게 넘겼다.
“크오오오오오오옷!!!”
마검을 잡은 연웅의 몸에는 검디검은 기운들이 넘쳐났다. 폭발적으로 상승해가는 기운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소목은 싱긋 웃으며 그의 혈 몇 군데를 흑옥빛 바늘로 찍었다.
‘지금 쓰러지면 안 돼. 꼬마야. 좀 더 힘내야지!’
소목의 응급처치를 받은 연웅은 갑자기 흑옥빛의 기운에 감싸였다. 머릿속은 텅 비어졌다. 모든 것을 잃었다는 것에 대한 분노는 고요함 속에서 더욱 커져갔다.
무명(無名)의 석학이 쓴 무림사기에는 이날의 연웅에 대해 다음같이 말했다.
“남자로서, 검황의 아들로서 모든 것을 잃은 이연웅은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기에 이른다. 그는 엮여버린 운명의 실은 끊어버리는 것이 가장 빠르고 속편한 방법이라 생각하고 선택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과 엮여있는 모든 운명의 실들을 끊어버리기로 작정했다. 4대 마검을 얻은 그가 가장 먼저 자신의 검술 스승인 발산검객(?散劍客)을 제거한 것이야말로 가장 큰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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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이 지났다.
검황과 정파 호법들간의 만찬이 있었다. 모두가 즐겁게 식사를 하고 있는 중에, 형부(刑部)의 자객이 도원호법 관상을 찾았다.
잠시 양해를 구한 뒤, 자객이 기다리고 있는 연못가로 향했다.
“그래, 또 살인 사건인가?”
“네. 어제의 사건과 매우 유사합니다.”
“그렇군. 알겠네. 아직 큰일이라 하기 힘든 만큼, 형부의 자객들에게 모두 입 조심하라고 전달하게. 간만에 찾아온 평화로운 시기에 검황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기 싫어서 그런다네. 빠른 시일내로 지원을 하도록 하겠네.”
“네!”
자객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한숨을 쉬며 돌아오던 관상을 충원호법 용검천이 보고 말았다.
“무슨 일이 관상 어르신에게 한숨을 선사하는 겁니까?”
“음……. 또 살인 사건이 벌어졌어. 아마도 동일인이 저지른 소행 같아.”
“어제의 사건처럼 말입니까?”
“어쩌면 형부내의 자객들만으로는 해결하기 힘들지도 모르겠어.”
“무슨 말씀이신지요?!”
“요 며칠 동안 일어난 살인 사건의 시체들은 모두 심각한 내상의 흔적이 있었어. 그렇다는 것은…….”
“마검?!”
“그럴 가능성이 높지. 가마 탈취사건에 유력한 후보로 마교의 과격파들이 꼽히고 있는 마당에, 마교측의 암살 자객이 숨어들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봐져. 실상, 정파 - 사파간의 사돈결연을 가장 싫어할 녀석들은 마교 놈들이니까 말일세. 그렇다면 검황님이나 능임 혹은 이연웅의 암살이 목표일 가능성이 높아.”
“그렇다면 제가 움직이는 편이 가장 빠르겠군요.”
“그것도 나쁘진 않겠지. 하지만 조심하게. 간만에 검황님께서 느끼는 평온한 나날들이야. 될수 있으면 심려를 끼치지 않게 조용히 해결 해야 한다네.”
“알겠습니다. 염려 마십시오.”
“그래. 누구보다 믿음직하니까 말일세. 자네를 믿겠네.”
관상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충원호법 용검천이 스스로 나섰다. 검황 직속 호위부대인 금호군의 수장인 그였다. 누구보다도 믿음이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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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용검천이 그믐달의 어두운 달빛을 건곤등룡(乾坤登龍)으로 뚫고 지나갔다. 살인 사건은 그 뒤로도 계속되었다. 그것도 관상이 말했던 것처럼 시체들에는 하나같이 주화입마의 흔적이 보였다. 마검이 분명했다. 마검의 위력은 군자도 위천삼에게 들어 익히 알고 있었다. 연속되는 살인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 마검으로 부터 자아가 붕괴되지 않은 자라는 이야기였다. 그렇다는 것은 굉장한 강적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이 사건 해결의 최적임자가 자신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한동안 봉래산 위주로 조사하던 것을 오늘은 곡천리로 옮겨보고자 했다.
“이, 이 기운은?!”
백도십삼천의 무릉도원이라 불리우는 절경의 시작, 폭포 부근에서 무지막지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기운이 고르지 못하고, 거칠며 새까맣게 느껴지는 것이 필히 살기에 가까운 것이었다. 용검천은 서둘러 발을 폭포쪽으로 옮겼다.
“후후후후! 하하하하! 와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미친 듯 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용검천은 기를 숨긴 채 조심스럽게 폭포 밑을 주시했다.
“용검천! 생쥐처럼 숨어있지말고 나와보게! 이제는 당신같은 호법급은 기를 숨겨도 충분히 알 수 있으니까 말이야.”
‘쳇……. 예상대로 보통은 아닌 녀석이군.’
희미한 그믐달빛 마저 구름에 가려버렸다. 흑옥빛의 기운에 휘감긴 사내는 또렷하게 용검천이 숨어있는 곳을 노려봤다. 순간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쳤다. 많이 어두워서 그의 얼굴을 확실히 볼 수는 없었지만 용검천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너무나 강한 살기가 자신을 긴장하게 만든 것이었다.
“그쪽에서 안 나온다면 내가 가지! 낄낄낄낄!”
흑옥빛의 사내는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리고는 전광석화처럼 용검천의 등뒤에서 검붉은 기운의 검을 휘둘렀다. 아슬아슬하게 회피에 성공했다.
분명히 잠깐이었지만 움직임을 놓쳐버렸었다. 구름에 가린 어두운 달빛이 시야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도 있겠지만, 방심할 수 없었다. 되도록 생포 해야했다. 뒤에서 도사리고 있는 음모가 어떤 것인지 밝혀 내야했기 때문이었다.
우선은 탐색전을 할 필요가 있었다. 폭포수 밑으로 이동한 용검천은 옆에 차고 있던 화신복마검(火神伏魔劍)을 뽑아 들었다.
“크오오옷!!!”
짧으면서 힘있는 그의 절도 있는 기합소리가 계곡으로 울려 퍼졌다. 그리고 순식간에 폭발적으로 기를 개방해나갔다. 문중선생의 무림사기에는 용검천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이 있었다.
“과거 손씨가문의 석학 한사람이 군쟁(軍爭)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가 있었다. 故其疾如風, 其徐如林, 侵掠如火, 不動如山. 이는 ‘군사를 움직일 때는 질풍처럼 날쌔게 하고, 나아가지 않을 때는 숲처럼 고요하게 있고, 적을 치고 빼앗을 때는 불이 번지듯이 맹렬하게 하고, 적의 공격으로부터 지킬 때는 산처럼 묵직하게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를 줄여 풍림화산(風林火山)이라고도 한다. 비록 병술가는 아니나 무림인으로서 ‘풍림화산’의 표본이 될만한 이들을 셋 꼽을 수 있다. 검황 이세진, 도제 능예, 그리고 정파 충원호법 용검천. 이들야말로 풍림화산처럼 권을 펼치는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엄청난 기와 기의 충돌이었지만, 주변은 의외로 고요했다. 유독 흑옥빛의 사내가 공격할 때만 시끄러울 따름이었다. 몇합을 주고 받았을까? 용검천은 자신의 화신복마검을 살짝 내려봤다. 조금씩 검날이 무뎌지고 있었다. 적이 가지고 있는 검이 필히 마검일 것이라는 확신이 섰다. 그는 조심스럽게 생각해봤다. 분명 움직임은 서툴렀다. 하지만 비정상적으로 빨랐다. 상대방은 몸에 무리가 가는 동작들의 연속이었다. 위천삼과 관상어른에게 들은바가 맞다면, 적이 들고 있는 검이 확실히 마검 이라면, 적은 자신의 힘으로 마검을 완벽히 제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는 것은 시간을 끌면 끌수록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확실한 전술의 갈피를 잡기 위해서, 마검인지 아닌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다음 합에 필히 확인할 것을 다짐하고 자세를 가다듬었다.
“하앗!”
“크하하하하하하!!!”
바람을 가르고 화신복마검이 불을 뿜으며 아름다운 원을 그려나갔다. 검과 검이 맞부딪히자 번개같은 불꽃이 튀겼다. 용검천은 분명히 볼 수 있었다. 검날에 희미하게 새겨져있는 ‘파열마’라는 글자를! 용검천은 웃음을 지었다. 빈틈이 보였다. 절벽에 발을 부딪히며 다시금 적을 향해 돌진했다. 검기가 계곡의 물줄기를 갈라버렸다. 정타는 아니었지만, 적을 맞춘 느낌이 있었다. 적은 오른쪽 이마 부근을 어루만지다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과연 용검천이야!!! 후하하하하하하!!!”
구름이 걷히고, 희미한 달빛을 받으며 웃음을 터트리는 흑옥빛의 사내를 보며 용검천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네, 네놈은! 아니, 소천주님?!”
“그래! 천하의 영웅 검황 이세진님의 아들인 이연웅이지! 앞으로는 마검 이연웅이라 불러라!!! 후하하하하하하!!!”
인간이라고 믿기기 힘든 기괴한 움직임으로 연웅은 용검천을 몰아붙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4대 마검은 용검천의 오른쪽 어깨를 스쳐 지나갔다.
“큿!”
스쳐 지나갔을 뿐인데, 차디찬 독기가 몸에 퍼져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니, 분명히 독기라고 하기엔 뭔가 달랐다. 그러나 지금의 상처에 대해 분석할 시간이 없었다. 우선 정신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기회를 잡은 연웅이 이를 놓칠 리가 없었다.
연웅의 계속된 공격이 이어졌다. 용검천에게 더 이상의 선택에 길은 없었다.
‘이제는 용비운천(龍飛雲天)밖에 없다!’
언젠가 다시 겨룰 마교의 묵월호법(墨月護法) 혈류천살(血溜天殺)을 위해 연마하던 용비운천을 사용하기로 결심했다. 도박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일격에 승부를 내고, 한시라도 빨리 주화입마의 증상을 제압해야했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앗!!!”
익숙지 않은 검법을 쓰는지라 그의 기합소리가 여느 때와 달리 길었다. 그의 화신복마검에게 과부하가 오는 것이 느껴졌다. 공력의 운행이 정상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무리하게 많은 공력을 검에 실은 탓이었다.
카카카카캉!
검의 비명소리가 계곡을 짜릿하게 울렸다.
실패가 용납되지 않는 순간이었다. 일단은 자신이 살고 봐야할 문제였다. 용검천의 눈빛에는 그 어느 때도 보이지 않던 살기가 감돌았다. 그러나 이내 다시금 평정을 찾았다. 누가 뭐래도, 그는 검황의 아들이었다. 어떻게든 그를 생포해서 전모를 확인해야했다.
“하아아앗!”
다시금 풍림화산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의 절도있는 기합소리가 천지를 울렸다. 검도 더 이상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몸은 미칠듯이 요동쳤지만, 마음이 평정을 찾았다. 완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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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하군.’
뒤편에서 몰래 지켜보고 있던 정체불명의 인물이 가슴속에 품고 있던 검을 꺼내 들었다.
거의 완벽하게 최종 오의를 완성해가는 용검천을 연웅이 당해낼 수 없을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검을 뽑아든 그는 용검천의 도약순간을 지켜보고 있었다. 공격하는 순간 첫타를 이연웅의 검과 동시에 막지 않으면 둘다 당할 위험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있었다. 그 순간이 평범한 무림의 고수라면 섬광의 일순간이라지만, 자신에게는 충분히 넉넉한 시간이었다.
“타앗!”
짧은 기합과 함께 용검천이 도약했다. 연웅은 용검천의 오의를 막기 위해 마검에 모든 힘을 실어 하강하고 있었다. 지금이었다.
정체불명의 사내는 연웅의 옆에 갑자기 등장하여 그의 마검과 동시에 용검천의 화신복마검을 노렸다. 용검천은 순간 움찔했다. 너무나 절묘한 순간에 들어온 협공이었기 때문이다.
땡캉!!!
간결한 파열음이 계곡을 울렸다. 용처럼 비상하여 한바퀴 돈 뒤, 땅에 착륙한 용검천은 자신의 왼손을 봤다. 화신복마검의 검날이 깔끔하게 부러져있었다.
그리고는 힘없이 앞으로 털썩 쓰러져버렸다.
“천주님. 큰일 났습니다!”
정원호법 탁응의 다급한 목소리가 검황을 잠에서 깨우고 말았다. 한동안 계속되어왔던 평화에 익숙해져있던 터라, 꽤나 짜증스럽게 느껴졌다. 그러나 잠시 뒤, 그의 다소 안일했던 생각들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뭐라고?! 용검천이 당했다고?!”
탁응의 이야기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검황은 서둘러 한약방으로 향했다. 약방 안쪽에는 용검천이 앉아있었고, 그 뒤편에서 도원호법 관상이 그의 기를 다스리고 있었다. 검황은 땀을 뻘뻘 흘리며 나오는 장생의원 공손현을 붙잡고 정황을 물어봤다.
“마검의 것으로 추정되는 마기(魔氣)의 제거는 성공했습니다만,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져있는 상황입니다. 아슬아슬하게 관상님이 기를 제압하기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만, 용검천님의 몸상태가 워낙 좋지 않은 터라…….”
공손현의 설명을 들은 검황은 탁응과 함께 방안으로 들어갔다. 한참 기를 제압하는 것에 몰두중인 관상은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검황은 천천히 눈을 감고 기의 흐름을 살펴봤다. 미칠듯한 기의 폭주를 관상이 겨우겨우 달래주고 있는 형국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용검천이 완성되지 않은 무공을 사용하다가 주화입마에 빠져버린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를 주화입마에 빠뜨리게 할만한 강적이 백도십삼천 내부에 존재하고 있단 말인가?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지금은 당황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점점 관상의 기가 흐트러져가는 것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는 서둘러 탁응에게 말했다.
“본좌는 지금부터 용검천의 주화입마를 막기 위해 이곳에서 사흘정도 자리를 비울 것이오. 그 기간동안 그대는 본좌의 대리역할을 맡도록 하시오. 최대한 빨리 용검천의 사건에 진상을 규명하도록 하시오. 그리고 대원호법!”
검황의 외침에 갑자기 관상의 뒤편에서 대원호법 황대언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형적인 모사꾼의 모습에서 기분 나쁜 미소가 새어 나왔다.
“대원호법 황대언은 만약을 대비하여 본좌와 도원호법을 호위하라.”
“네. 걱정 마십시오.”
촌음을 다투는 일이었기에, 검황은 곧장 용검천의 앞으로 가서 공력의 제압에 힘쓰기 시작했다. 황대언의 능구렁이 같은 눈빛이 탁응과 마주쳤다. 그리고는 조용히 탁응의 오른쪽 어깨에 손을 올리며, 속삭였다.
“서둘러 천주님의 명을 따르셔야죠. 특별한 용무없이 주위를 얼씬거린다면, 설사 호법이라도 용서치 않을 거외다.”
지독할 정도로 독기 가득한 그의 뱀같은 눈동자였다. 탁응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빌어먹을 황대언! 네놈 따위가 감히 본좌에게 협박을?!’
탁응은 이를 으드득 으드득 갈며 약속장소로 향했다. 군웅성의 허물어진 성벽들 사이로 소목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검은 빛의 옷깃을 매만지며 조금 격한 어조로 말했다.
“시간이 많이 늦었군요. 나의 귀여운 인형은 참을성이 없단 말이에요.”
“미안하오.”
그녀 스스로도 언제 마검에 중독되어있는 이연웅이 사고를 저지를지 몰랐다. 변명을 들을 시간이 없었다. 그녀는 서둘러 본론으로 들어갔다.
“약속대로 검황의 방에 보관되어있는 8대 마검을 진자성의 숙소에 은밀히 숨겨두세요. 나머지는 잘 아시겠지요?”
“알겠소.”
탁응은 고분고분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계획대로 좀전에 검황의 대리 및 용검천 사건의 진상규명에 대한 명을 받았다. 이제 8대 마검만 진자성의 방에 잘 숨겨둔다면, 모든 일은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다. 그는 백도십삼천의 본좌 자리에 오를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다할 각오가 되어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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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꺄아악!”
능임의 몸은 땀으로 흥건히 젖어있었다. 악몽이었다. 며칠째 능임은 똑같은 악몽을 꿨다. 진자성과 행복한 나날을 보내다가, 그가 돌연 괴물로 변해서 자신을 겁탈하는 꿈이었다.
땀을 닦아내며 마음을 추슬렀다. 크게 호흡을 가다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을 살펴봤지만, 연웅이 돌아온 흔적은 조금도 없었다.
한숨이 나왔다. 멍하니 벽에 걸려있는 금호군을 상징하는 문양의 웃옷을 살펴봤다. 그리고 며칠 전, 정신을 잃었던 부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봤다.
달구경을 나갔었고, 사색에 잠겨 있다가 탁응이란 자를 만났다. 그자가 건네준 차를 마셨고, 그다음부터 기억이 나질 않았다. 며칠째 그녀의 기억은 제자리를 헤매고 있었다. 흐릿 흐릿하면서 무서운 암흑에 숨겨져 있는 기억. 그녀는 다시 두 눈을 꾹 감고 그때의 그 기억을 떠올렸다. 순간 야수의 눈빛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무서웠다. 그러나 계속해서 피하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었다. 용기를 내어 좀 전의 회상을 이어갔다. 그 야수의 눈빛. 주인공은 진자성과 흡사했다. 그녀를 감싸고 있는 금호군의 웃옷이 확신을 가져다줬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일이 이렇게 꼬여버린 것인가! 한탄할 노릇이었다. 그랬다. 분명히 자신을 범하고 있던 남자는 진자성이었다. 그녀는 크게 고개를 저었다. 악몽일 것이라고, 모든 것은 꿈이었을 거라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벽에 걸려있는 금호군의 옷은 모든 것이 현실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갑자기 한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섬뜩한 소리가 이어졌다.
“능임. 잘 지내고 있었느냐?”
깜짝 놀란 능임은 서둘러 좌측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흑옥빛의 악마가 무시무시한 살기를 뿜으며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온몸에 냉한(冷汗)이 흘렀다. 이 정도의 살기는 범인(凡人)이라 할지라도 충분히 간파할 수 있었다. 그녀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다시금 눈앞의 악마를 살펴봤다. 그리곤 깜짝 놀랐다. 그 악마의 모습은 틀림없는 연웅이었던 것이다.
“상공(相公)!”
“상공? 그래! 진자성과 둘이서 잘도 바람을 피우고, 상공이라고 부르느냐?!”
“상공! 뭔가 오해가 있습니다!”
“내 비록 정략적인 문제로 네년과 뜻하지 않게 부부의 연을 맺었건만, 어떻게 날 이토록 바보 천치로 만들 수 있느냐!!! 대답을 해보란 말이다!!!”
“상공!”
“정략적인 혼인이었지만, 난 그래도 널 내 아내로서 인정하고 사랑하기 위해 노력했다. 내가 그토록 밉더냐! 진자성 대신 날 사랑해줄 수는 없는 것이었냐!!”
감정에 호소하는 연웅의 외침이 연신 터져 나왔다. 연웅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리면서 악마 같던 모습이 온화하게 바뀌 어져갔다. 그런 연웅의 모습을 보자, 능임은 괴로웠다.
그녀는 양손으로 머리카락을 쥐고는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눈동자에서 구슬같은 눈물이 떨어졌다. 운명에 굴복했기에, 진자성에 대한 옛 기억들을 추억으로 묻어 뒀어야 했다. 혼약 이후에도 줄곧 진자성에 대한 갈증을 부정히 여긴 하늘의 엄벌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꿈이었으면 좋으련만! 기나긴 악몽이었으면 좋으련만! 후회를 한다한들 모든 것이 너무도 크게 어긋나 있었다.
“잘못했습니다. 모든 것은 제 잘못이었습니다! 부디, 부디 용서를 해주십시오!”
“그래, 진자성과 한번 놀아봤으니 나랑도 놀아보고 싶다는 것인가 보구나! 하하하하!”
“무, 무슨 말을……!”
연웅은 다시금 흑옥빛 기운으로 가득한 악마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의 눈빛, 목소리 모든 것이 사악함 그 자체로 돌변해가고 있었다.
“진자성과의 놀음은 어땠느냐? 즐거웠느냐? 하긴 연인 사이였으니, 이번이 처음은 아닐지도 모르지! 그렇지 않느냐?!”
“상공!!!”
“듣기 싫다!!!”
“아아아아아아아악!!!!!”
울분에 못이겨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비명소리에 연웅은 다시 움직임을 멈췄다. 사악한 마기와 계속해서 싸우고 있는 듯 했다. 고통스러워하는 연웅의 모습은 능임의 모성애를 자극했다. 가슴 쓰라렸다. 능임은 눈물을 흘리며 연웅에게 다가갔다. 마기와 싸우는 연웅이 무서웠지만, 그를 그냥 놔둘 수 없었다. 연웅은 머리를 잡고 계속 고통스러워했다. 능임은 연웅을 감싸 안았다.
“모든 것이 제 잘못입니다.”
능임의 몸에서 연웅의 몸으로 온기가 전달되었다. 그 온기에서 연웅은 어머니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 기분이 좋았다. 모든 것을 용서해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크아아아아악!!!!!”
연웅의 몸에 박혀있는 흑옥빛의 바늘로부터 이상한 기운이 쏟아졌다. 갑자기 미칠 듯한 괴성을 지르며 그녀를 밀쳤다. 그녀와의 거리가 벌어지자 연웅은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휭”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붉은 빛의 선혈이 그녀의 가슴에서 솟구쳤다. 선혈은 뽀얀 그녀의 흰 옷을 조금씩 덮어갔다. 그녀에게 붉은 빛은 곧 캄캄한 어둠의 빛으로 바뀌어져 갔다. 그것이 그녀가 본 마지막 빛깔이었다.
“크크크크. 그래, 모든 것은 네 잘못이니라!”
연웅의 얼굴에 그녀의 선혈이 튀었다. 이어서 광기어린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의 모습은 이미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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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아아아아아악!!!!!”
외마디 비명소리가 진자성의 귀를 찢어지게 울렸다. 틀림없이 별채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그는 서둘러 별채로 발을 옮겼다.
별채 안에는 선혈이 낭자했다. 서있는 자는 연웅이요, 붉게 물들어 쓰러져있는 자는 틀림없는 능임이었다. 살기 가득한 연웅을 지나, 붉게 변해가는 능임에게 다가갔다. 연웅이 뭐라고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진자성에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앞에서 털썩 무릎을 꿇어버렸다.
“능임!”
그녀를 부둥켜안았다. 그리고 입을 맞췄다. 연웅이 뭐라고 악을 썼다. 조금도 진자성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이윽고 화에 못이긴 연웅이 마검을 휘둘렀다.
“캉!”
짜릿한 충격이 검날을 통해 손끝으로 전해졌다. 그의 검날을 진자성의 옥룡천광보도(玉龍天光寶刀)가 강타한 것이었다. 진자성의 눈빛에서 불꽃이 튀었다.
“네 이놈!!! 이연웅!!!”
이번에는 진자성의 옥룡천광보도가 수직으로 허공을 갈랐다. 칼날은 이연웅이란 목표를 반으로 가르기 위해 용과 같은 기세로 쫓았지만, 이내 마검이 길을 막아버렸다.
검과 도가 마주칠 때마다 불꽃이 튀었다. 눈빛과 눈빛이 마주칠 때마다 벼락이 내리칠 듯 했다. 그야말로 용호상박(龍虎相搏)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떠한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오로지 눈앞에 보이는 저것을 멸(滅)시켜버리려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10합을 주고받았다. 이연웅은 갑자기 머리를 매만지기 시작했다. 통증이 찾아왔다. 미칠 것만 같은 통증이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진자성의 검이 불을 뿜었다. 전광석화와도 같은 일격이었다. 아슬아슬하게 피한 이연웅은 재빨리 도주해버렸다. 추격하려고 경공을 하려할 즈음, 갑자기 시간이 멈춘 마냥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점혈?!’
누군가가 순식간에 극양지(極陽指)로 진자성의 혈을 제압해버린 것이었다. 이내 사람들이 몰려드는 소리가 들렸다. 금호군 제 2대장 조인과 추적대장 철휴가 진자성의 앞에 나타났다. 그때 진자성의 뒤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반역자 금호군 제 1대장 진자성을 지금 즉시 구속하라!”
틀림없는 정원호법 탁응의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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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황이 용검천의 치료 때문에 자리를 비운지도 이틀이 지났다. 그 기간 동안 백도십삼천의 지도부 측에 혼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며칠동안 연쇄적으로 살인사건이 있었고, 천하의 용검천이 당했다. 천주인 검황은 용검천의 치료 때문에 부재중이었으며, 소천주 이연웅은 제법 오랫동안 행방이 묘연했다. 거기에 능임도 살해당했으며, 유력한 용의자로 구속된 자가 벽무도 진자성이었다.
금호군 제 2대장 조인은 추적대장 철휴에게 분노가득한 말을 뱉어냈다.
“내 일찍, 벽무도에 대해 높이 평가했건만 이토록 뒷통수를 칠 줄이야!”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잖습니까? 저는 진자성 홍와원 동기인지라 누구보다도 그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가 능임을 흠모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만행을 저지를 악인은 절대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그는 북설산 출신이야. 북설산에서도 악마의 아이라 불리며 부족에게 추방된 놈이지. 운 좋게도 마음씨 넓으신 검황님을 만나서 이렇게 키워줬건만! 배신감이 느껴지는구먼.”
“몇 번을 말해야 아시겠습니까? 남의 과거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제가 아는 금호군 제 1대장 진자성은 절대 검황님을 배신할 분이 아닙니다!”
두 사람의 말다툼이 절정을 이루려던 때였다.
멀리 진자성의 숙소를 수색하던 추적부대원 한사람이 헐레벌떡 두 사람의 앞에서 어떤 붕대로 봉인된 물체를 가져와 몸을 숙여 말했다.
“용의자 진자성의 방에서 수상한 물체를 찾았습니다!”
조인은 수상한 물체를 건네받은 뒤 조심스럽게 붕대를 풀어나갔다. 그리고 순간 두 사람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8대 마검?!”
조인이 큰 소리로 말했다.
“거봐라! 내가 말한 그대로지 않느냐? 진자성, 이 배은망덕(背恩忘德)한 녀석은 당장 목을 쳐야해!!!”
철휴는 고개를 저으며 생각했다.
‘아냐. 뭔가가 이상해. 마치 누군가가 그를 몰아붙이는 것만 같아.’
그날 저녁, 천주 대리 정원호법 탁응은 백도십삼천 전역에 중대 발표가 있다고 공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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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가 찾아왔다.
탁응은 특사에게 패왕파천련 앞으로 보내는 밀서를 전달하였다. 밀서를 받든 특사는 순식간에 북설산 패도성으로 향했다.
군웅성에는 수많은 백도십삼천의 무림인들이 모여 있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성안을 가득 메웠다. 탁응은 천천히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밑을 내려보니 무림인들이 개미처럼 보였다. 그리고 자신을 쳐다봤다. 짜릿했다.
‘비록 지금은 대리로서 이 자리에 서있지만, 조만간 반드시 내가 본좌의 자리에 올라 너희들을 다시 보리라!’
탁응은 흐뭇했다. 이번 발표로 인해, 자신의 야망에 한걸음 더 다가설 수 있으니 말이다.
“지금부터 중대 발표를 시작하겠다. 이는 백도십삼천의 천주이신 검황 이세진님의 대리로서 천하에 공표(公表)하는 것이라!”
탁응의 우렁찬 목소리가 정파인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갑작스러운 침묵은 폭풍전야(暴風前夜)를 연상시켰다.
“먼저 소천주님의 아내이신 능임님이 어제부로 유명(幽冥)을 달리하셨다!”
엄청난 혼란 상태에 빠져들게 되었다. 평화의 상징이었던 정사간의 사돈결연이 깨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허나 탁응은 이내 사람들을 진정시키며 말을 이어나갔다.
“범인은 바로 금호군 제 1대장 벽무도 진자성이었다!”
다시금 장내가 소란스러워졌다. 특히 금호군 쪽의 분위기는 초상집과 같았다. 이내 진자성의 부하들이 ‘뭔가 오해가 있을 것입니다!’, ‘진자성님은 절대 그럴 분이 아닙니다!’라며 항의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금호군 제 2대장 조인이 입을 열었다.
“모든 것은 사실이다! 진자성이 진정 범인이었던 것이다! 증거도 있다.”
‘증거’라는 소리에 모두가 다시금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조인은 오른손에 쥐고 있던 붕대로 봉인된 물체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붕대를 순식간에 풀어버렸다. 다시금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다.
‘8대 마검!’
백도십삼천의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기억하고 있다. 과거, 검황이 혈무교와의 작은 분쟁에서 뜻하지 않은 수확물을 얻었다며 모두에게 자랑하던 것을!
그 사건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마검이라는 존재가 알려졌다. 검황에게는 직접적으로 전달되지 않았지만, 이미 많은 백도십삼천 사람들이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연쇄살인 사건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연쇄살인사건이 마검에 연관되어 있을 것이라는 설이 지배적이었다. 군중들 속에서 누군가가 크게 외쳤다.
“그를 죽여라!”
이어서 다른 곳에서도 같은 소리가 이어졌다. 장내는 다시금 혼란 속으로 빠졌다.
“조용히들 하시오!”
탁응의 목소리에 사람들은 다시금 진정을 찾았다. 그는 천천히,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모든 정황을 살펴보아, 진자성의 죄가 명백하기에 그에게 극형을 선포하겠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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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형을 선포받은 진자성은 곧장 사형장으로 호송되었다. 용검천의 회복이 빠르면 사흘 걸릴 것이었기에, 탁응의 입장에서는 삼일천하(三日天下)가 끝나기 전에 모든 것을 처리할 필요가 있었다. 제동을 걸만한 호법들은 모두 부재중이었던 터라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 생각보다 너무 빠른 탁응의 일처리에 미심쩍은 부분이 많았지만 그는 분명 검황의 대리였다.
탁응의 일처리가 너무 빠르다는 것을 가장 의심하는 자는 추적대장 철휴 였다. 홍와원에서 함께 지낸 시간이 제법 되었던 만큼, 누구보다도 진자성의 인품을 잘 아는 그였다. 그런 그의 눈에는 누군가가 진자성을 제거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지금 자신의 임무는 죄인 진자성을 사형장까지 호송하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어떠한 권력도 없었다. 상부의 지시는 따라야 할 뿐이었다.
쇠사슬로 포박되어있는 진자성은 멍하니 하늘을 쳐다봤다. 어두운 먹구름 사이로 달빛이 조금씩 흘러나왔다. 능임과의 옛 추억이 떠올랐다.
“그래. 저 구름이 떴을 때, 얼마 안가서 폭우가 쏟아졌었지.”
중얼거림에 철휴는 잠시 움찔했다. 살인현장에서부터 계속해서 넋을 잃었던 진자성이 비로소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그는 고뇌했다. 진자성은 절대 그런 죄를 저지를 인물이 아니다. 무슨 사연이 있음에 분명하다.
고뇌하는 철휴에게 진자성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철휴. 자네라면 알고 있을 거야. 하늘에 맹세코, 나는 능임을 죽이지 않았어.”
“그래.”
철휴는 잘 알고 있었다. 그가 ‘하늘에 맹세코’라는 말을 하면 그것은 절대적인 진실이었다. 과거 요마퇴치 임무를 받고 나갔던 시절, 왼쪽 발목이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던 적이 있었다. 자신을 버리고 도망쳐라고 그렇게 말했건만, 진자성은 “하늘에 맹세코, 너와 함께 살아나갈 것이다!”라고 말했었다. 그리고는 그를 구해 살아 돌아갔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검황이나 타인에게 말을 할 때 ‘하늘에 맹세코’라는 말이 나오면, 그것은 절대적인 약속이나 진실이었다.
더 이상 말이 필요없었다. 철휴는 그를 구속하고 있는 쇠사슬을 박살내버렸다. 그리고 해혈을 시전했다.
“이 철휴, 하늘에 맹세한 진자성을 끝까지 믿어보겠다! 진자성은 항상 약속을 지키는 사나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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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도십삼천의 특사가 전달한 밀서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특히 도제는 다음 부분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했다.
‘…능임과 금호군 제 1대장 진자성이 간통했다!… …이 문제가 밝혀지는 것이 두려웠던 진자성이 능임을 비참하게 제거했다!’
도제의 도가 불을 번쩍였다. 일순간에 특사의 목이 달아나버렸다. 매우 격앙된 어조로 도제가 입을 열었다.
“내 사랑하는 딸을 지키지도 못한 것에다가, 간통죄까지 뒤집어 씌워?! 이것이 이때까지 나에 대한 이세진, 네놈의 답변인 것이냐?! 용서치 않으리라. 절대 용서치 않을 것이야!!!”
극도의 흥분상태인 도제에게 개세호법 상관엽이 말했다.
“너무도 갑작스럽게 일이 급변하고 있습니다. 지난번 가마사건도 있고, 혈무교 같은 흑막이 있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상관엽의 말에 도제는 잠시 이성을 찾아 생각에 빠졌다.
자신이 아는 검황 이세진은 이 일이 사실일지라도,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할 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러한 대외적인 공표는 필히 본좌의 위치가 아니면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검황이 아니라면 누가 한 일이란 말인가? 아니다. 상관엽의 말처럼 지나치게 상황이 급변하는 것도 뭔가 수상했다.
“후우~”
큰 한숨을 내쉬었다. 능임의 얼굴이 갑자기 떠올랐다. 얼마나 애지중지하며 키워온 딸이었던가? 거기다 애비의 말을 착실히 들으며, 괴로울 때 늘 힘이 되어주었던 소중한 딸이었다. 일찍 어미를 여의었건만, 싸움밖에 모르는 애비 밑에서 그렇게도 곱게 커준 금지옥엽(金枝玉葉) 같은 딸이었다. 정사 사돈결연 이후 오현녀 임약선이 원래 능임은 이연웅 이외의 누군가를 흠모했었다고 귀뜸을 해주었었다. 하지만 어떠한 불평없이 애비의 말을 따라준 고마운 딸이었다. 혼약을 맺을 때 딸 의사를 묻지 않았던 것이 너무도 한탄스러웠다. 그는 다시금 더 깊이 생각을 해봤다.
딸이 죽었다는 말 자체가 믿기지가 않았다. 누군가가 잘못된 정보를 제공한 것일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어쩌면 특사가 상관엽의 말처럼 혈무교의 이중첩자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확인이 필요했다.
도제는 용형도(龍形刀)를 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패왕파천련의 호법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본좌는 지금부터 능임의 생사를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러 가겠다. 모든 것은 생사 확인 이후, 결정하도록 하겠다!”